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은 Oct 07. 2022

하도리의 밤

하도리오길잘했어 A룸 방명록 10권 24페이지


제주도 하도리의 숙소

'하도리오길잘했어' A룸에 작성한 방명록

이후에도 다시 보고 싶어 브런치에도 남깁니다.



이 방의 문을 열자마자 소공녀의 다락방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저는 소공녀가 아니고 여긴 다락이 아니지만...이 방에 오신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방명록을 10권부터 7권까지 거꾸로 읽어가며 지난 여행자들의 여행과 쌓인 고민과 여러 추억들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2017년부터 7년간 이어져 온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읽고 떠나는 게 오늘 밤의 목표입니다.



앞선 분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 역시 삶의 기로에 서서 많은 고뇌를 안고 제주에 왔습니다. 처음엔 그 이야기들을 방명록에 풀어내 볼까 했는데, 그걸 다 쏟아내다 보면 여러 장을 써도 부족할 것 같아 여행의 감상만 남겨두려고 해요.


타지에서 산 지 오래되었지만 성인이 된 후 사회에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던 탓에 저는 주로 혼자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혼자인 것과 여행에서 혼자인 것은 아주 다른 것 같아요.


굳이 사색하지 않아도 혼자 먹고, 혼자 걷고,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복잡하게 꼬여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꼬여있던 게 생각인지, 마음인지, 인생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일상에서 혼자 있을 때는 엉망진창이던 것들이 여행을 하면 제 길을 찾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어찌 되었던 여행이라는 무기(또는 리셋버튼)가 있어서 그게 언제이던지 '나를 나답게'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아, 얼마 전에 4년 전의 제가 예약 발송해놓은 메일을 받았는데요. 그걸 썼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메일을 받고서는 난데없이 한밤중에 엉엉 울었답니다. 불안정했던 과거의 내가 보내준 응원에 정말 감동받았어요.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추천합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제가 쓰고 받은 메일의 한 구절을 나눠봅니다.


네가 뭔가를 하고 싶다면 나이를 생각하지 말고 해 버려.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을 때, 그 사람이 마흔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한심하다 생각하지는 않잖아. 오히려 대단하다, 용기 있다고 하지.

언제나 대담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지금의 나는 무엇도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미래의 너에게 이 열정만은 남기고 싶다.


4년 전의 저는 삶이 벅차고 두렵고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했지만,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제게 남겨준 말들을 보면...꽤 멋진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 제 스스로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ㅋㅋ)


지금의 제 모습을 5년 뒤, 10년 뒤에 돌아봤을 때 그때도 나 꽤 멋있는 삶을 살았다고 회고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틀 전에 '애월책방 이다'에 가서 블라인드 책을 한 권 샀어요. 포장이 되어 있어서 책 제목도, 분야도 전혀 모르는데. 포장에 이런 문장이 쓰여있더라고요.


스스로를 무너뜨려 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이겨낼 수 없다고 믿는다. 나를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앓을 수 없다.


이 문장을 거기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아서 같이 여행하기로 했어요. <<하얀 난쟁이는 영원히 소멸 (서하나)>> 라는 책이었습니다.


평소였다면 절대 잡지 않았을 류의 제목과 표지였는데 내용이 좋아서 여행 다니며 제주의 어느 카페에서, 곶자왈에서 참 많이 울먹였어요. 뜻 없이 울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산뜻해지더라고요.


이미 한 페이지 반. 더 이상 구구절절해지면 안 될 것 같아 책에서 좋았던 문장을 몇 줄 적고 이만 끝내겠습니다. 모두 안고 온 고민들 잘 해결되시길, 그리고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라요!


당신의 시간은 제대로 흐르고 있나요. 만난 적 없이 그리운 사람.
p.62
진짜 초라한 건 이 귀가 끝에 안전한 내일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젊음을 다 걸었던 시간이 이 정도면 뿌리내렸다 생각했던 단단한 믿음이 착각으로 환불되었을 때 뼛속 깊이 가난이 밀려온다. 무력하다. 무력하다는 말에 무기력이 묻어 나와 몰래 바닥에 버렸다. 비열한 본성이다.
p.40
서로를 이해하는 게 왜 중요하냐면 결국 그게 관계의 극복이니까. 친구는 관계의 해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자꾸만 화가 난다고도 했다. 친구야, 해서 안되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자. 너무나 각자인 채로 죽어가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수렴될 텐데. 이 우주에 없는 듯이 서로를 버려두지 말자. 그거 무척 외로운 일이잖아.
p.25





방명록에서 인상 깊게 읽은 글들도 함께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나는 비록 ... 또 이룬 건 없지만.

그럭저럭 살고 있고 그럭저럭 행복해요.

이 행복이 쭉 이어지길^^ 바라는 것들 대충 이루어지길. 서울에 돌아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반겨주길. 재수 없지만 보고 싶다!

2022. 10. 7.

- 내 바로 앞에 같은 방에 묵었던 분. 그럭저럭 한 행복이 이어지길, 바라는 것들이 대충 이루어지길 이라는 말이 너무 와닿아서 댓글도 남겼음 하하


나만의 오로지 나를 위한 무언갈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아직 입문자이지만ㅎㅎ 나를 사랑하세요! 저는 저를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항상 남들에게 사랑을 갈구했던 저였지만 저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될 거예요.

2022. 10. 5.


아무 일이 없다가도 마음이 답답하고 점점 웃는 게 힘들어지더군요.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이겨내고 살아가는지 궁금해요.

외로움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해가 잘 안 됐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외로움을 표현하는 단어를 잊어버렸나 봐요.

2022. 09. 18.




공감가는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6권부터 1권까지 남은 이야기들을 읽으러 이만 떠납니다. 창 밖으로 풀벌레 소리와 고양이가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이 밤, 떠나간 사람들의 불안한 희망을 안고 잠들려고요.

부디 모두에게 평안한 밤이 되기를.



작가의 이전글 나의 은밀한 취미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