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희망은 무릎걸음이었으나, 때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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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염

쇼펜하우어의 끝에 니체가 왔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이라 했고, 니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라고 했다.

배경은 하나의 톤이었지만, 장르는 여러 개로 나뉘어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와도 만나기 싫고 어디에도 가기 싫었지만, 나라는 인간의 무의식에는 혼자만의 과잉배려가 있다.

말이 배려지. 사실은 내 마음을 못 견뎌하는 이기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가족들과 여행을 계획했다. 2박 3일의 여행을

그것은 반억지로 끌려가는 수용소행 같은 여행이었지만(그 사실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의 웃음에 어느 정도 동화되어 나도 그 틈에서 웃어 보였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것도 있고, 일종의 분위기 맞춤용 웃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웃으면 복이온 다니까, 손해는 아니다. 꼭 손해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한 여행지를 한두 군데 돌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없는 농담, 경치에 관한 감탄, 혹은 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 등이 오갔다. 우리 가족은 술을 즐겨마시지 않지만 기분을 내려고 아버지가 8병이나 챙겨 온 것이 황당했다. 하루일정을 마치고 시골동네라 낮에 보던 그런 예쁜 뷰는 안보였지만, 밤바다 파도소리가 숙소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왔기 때문에, 마치 따뜻한 밤 해변에 테이블을 놓고 담소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독일맥주를 손에 한 병씩 들고 포장해 온 모둠회와 젓가락질, 그리고 각자의 목소리가 오갔다. 어느 술자리의 담소가 그렇듯 우리 역시 어느 시점의 혹은 당시의 주제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공유? 혹은 관철하는 자리가 되었다. 나는 사실 토론이란 이름의 행위를 좋아하지만, 이것을 좋아하는 나의 안 좋은 모습을 최근에 느끼고 있던 터라

최대한 제삼자로써 말하는 그들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수용하고, 그들 또한 그랬다.


여행지는 무척 아름다웠다. 요즘 여행이라는 것이 숙소가 그럴듯하거나, 혹은 매우 유명한 음식이나, 인테리어가 그럴듯한 카페를 찾아 디저트를 먹는 것이 여행이라는 행위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여행지는 그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멋진 숙소에 인테리어가 훌륭한 야외 카페에 있는 기분을 주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운전은 내가 했지만 운전을 하는 내네에도 나의 시야에 멋진 풍경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침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미동도 없던 휴화산이 활동을 시작하여 뿜어내는 마그마 같은 태양을 뿜어내고, 태양이 모든 시야를 트여준 후에는 해변마다 은모래나 크고 작은 둥근 자갈들이 파도소리에 맞춰 함께 구르며 소리를 냈다. 새벽에는 모든 빛이 파업을 하는 것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한숨을 고르고 그 영원할 것 같은 정적을 몇 초 견디면 파도소리가 귀를 울리고, 고개를 조금 들어 어딘가 응시하면 돔형태로 밤하늘에 박아놓은 듯한 별들이 여느 유럽의 대성당이나 동유럽의 사원들 내부보다 웅장했다.

숨을 한숨 두 숨 들이켜고 내 쉬다 보면, 내가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머리도 가슴도 아닌 내면의 무언가로부터 느껴졌다. 이 파도소리 안에 내가 휩싸여있고, 이 별들이 나를 안아주고 있으며, 바닷바람이 내 온몸을 거대한 식물뿌리처럼 감겨 뻗어져 나가는 것이 느꼈다. 어린 왕자의 나오는 바오밤나무 같은 바람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아침에 홀로 눈을 떠 방파제에 안쪽에 길이 하나밖에 없는 숙소 앞을 나와 해가 떠오르는 것에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나는 뜨거운 땀이 삽시간에 차가워지는 느낌이 좋았고, 그것은 마치 바닷바람이 실시간으로 내 안의 한없이 꼬여있는 실타래를 풀어 연을 날리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리다 달리다 방파제에 쓰여있는 어떤 문구를 보게 되었다.


' 언제나 희망은 무릎걸음이었으나 때늦지 않다. '


뭔가 복선 같은 이 상황이 매우 격양된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다.

달리다 달리다 그 벽에 도달해 문구를 본 순간, 내가 자력으로 달려 잠시뿐일지 모르는 어떤 희망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 그간의 엉킨 실타래 같은 나를 위로했다. 뭔가를 재자각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살면서 사람이라면 느끼는 때때로의 희망적인 순간들 있지 않나. 그것을 경험했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고장 난 발전기에 전력이 공급될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별거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는 느꼈다. 삶을 살아내 오면서 고난과 역경과 희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개개인의 특성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삶에 희석된 고난과 희망의 비율은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늘 쇼펜하우어의 말에 공감하고 냉소적이었다가, 니체의 말을 공감하며 다시 살아간다. 희망이라던가 의지라던가의 저마다의 이유로.

한마디로 나는 희망에 도달했다. 그리고 언제나 희망은 무릎걸음이었으나 때늦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