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스스로의 고삐를 풀고, 잡아야 하는가?

자기위로와 자기비판의 기준선

by 이수염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며 살아간다. 어떤 일을 경험한 뒤 그것을 단순한 사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실패를 겪으면 그 실패에 대해 설명하려 하고,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으면 그 감정의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인간의 삶은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라기보다, 그 사건을 스스로 해석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같은 실패를 겪어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시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한계로 해석하며 더 이상 시도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상처 속에서도 자신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상처 속에서 오랫동안 멈춰 서기도 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성격의 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은 언제나 정직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위로하고, 때때로 자신을 비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위로가 언제나 건강한 것은 아니고, 그 비판이 언제나 정확한 것도 아니다. 어떤 위로는 인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지만, 어떤 위로는 인간을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은 언제 자기위로이고, 언제 자기기만이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단순히 심리적인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다루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완전히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 속에서 판단하고, 경험 속에서 자신을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기위로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순간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종종 서로 충돌한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현실을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 하고, 자신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 한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이 두 움직임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자기위로와 자기기만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게 느껴진다.


인간이 자기기만에 빠지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정직하기 어려운 존재다. 우리가 현실을 조금 왜곡하는 이유는 단순히 거짓을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현실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인정하는 일은 때로 고통스럽고,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는 일은 때로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조금 부드럽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항상 완벽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쉽게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자기위로는 인간이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위로가 어느 순간 현실을 가리는 언어로 변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자기위로와 자기기만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말의 형태가 아니라 그 말이 만들어내는 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말은 인간을 잠시 쉬게 하지만 결국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말은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인간의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된다.


첫 번째 기준은 책임의 존재 여부다.

건강한 자기위로는 현실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인간 전체를 부정하지 않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부족했지만 나는 다시 시도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위로일 수 있다. 이 말은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실패가 인간 전체의 가치가 되지 않도록 막아줄 뿐이다. 반면 자기기만은 종종 책임을 흐리게 만든다. 실패의 원인을 항상 외부로 돌리거나, 자신의 선택을 전혀 돌아보지 않게 만든다. “상황이 나빴을 뿐이다”라는 설명이 반복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피하기 위한 언어가 된다. 자기위로는 인간을 보호하지만, 자기기만은 현실을 보지 않게 만든다.


두 번째 기준은 행동의 방향이다.

건강한 자기위로는 인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그것은 잠시 상처를 덜어주지만, 동시에 다음 선택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다시 시도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인간에게 다음 행동의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자기기만은 인간을 멈추게 만든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그 말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위로와 자기기만을 구분하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이 말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가.


세 번째 기준은 시간 속에서의 지속성이다.

자기기만은 종종 시간이 지나면 무너진다. 현실과 맞지 않는 설명은 결국 어느 순간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위로는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완전히 무능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은 현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말이다.


이 세 가지 기준은 완벽한 공식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위로와 자기기만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어떤 순간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조금 부드럽게 바라보고, 또 어떤 순간에는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현실을 조금 더 엄격하게 바라본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완벽한 기준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나에게 하고 있는 이 말이 나를 지켜주는 말인지, 아니면 나를 멈추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 그 질문을 계속할 수 있다면 인간은 완전히 자기기만 속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말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삶에서 가장 오래 반복되는 말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조금씩 배워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성숙이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다루는 방식을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제 자신을 비판해야 하는지, 언제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위로가 언제 현실을 가리는 언어로 변하는지를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계속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된다. 자신에게 하는 말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서

스스로의 고삐를 알맞게 풀고, 잡으며

잘 달리고 있는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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