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에서 시작된 의미없는 적대의 사회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계를 구분하며 살아왔다. 나와 다른 것, 나와 우리 편, 그리고 나와 적.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사회적 습관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나에게 위협이 되는지,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빠르게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냥을 해야 하는 존재에게는 사냥감과 동료의 구분이 필요했고, 포식자를 피해야 하는 존재에게는 안전한 영역과 위험한 영역의 구분이 필요했다. 그렇게 세계는 자연스럽게 둘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분은 인간에게 매우 효율적인 인지 방식이었다. 복잡한 세계를 빠르게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사물을 범주로 나누고, 비슷한 것끼리 묶고, 다른 것들을 분리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생물 집단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었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명명하기 시작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만들며 세상을 이해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의 사고는 점점 더 정교한 구분을 만들어낸다. 국가, 종교, 이념, 세대, 문화, 성격, 취향과 같은 수많은 분류는 모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들이다. 구분은 이해를 돕고,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생각을 정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구분이었던 것들이 점차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편에 속한 사람이 된다. 정치에서는 오래전부터 파벌이 형성되었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은 점차 서로를 경쟁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쟁은 어느 순간 대립으로 변한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격을 설명하는 도구에서도 비슷한 구분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성격 유형을 설명하는 체계에서는 사고와 감정을 구분하고, 계획과 즉흥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본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자신의 가치관을 알고,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이해하는 일은 단순한 자기 분석을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고 정의함으로써 비로소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명명하고 싶어 한다. 나는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며,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선언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세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을 정의하는 일은 곧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은 언제나 하나의 특징을 가진다.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차이를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생각에 가깝고 저런 생각과는 다르다.
즉,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와의 차이를 통해 자신을 설명한다. 내가 무엇인지 말하는 동시에 나는 무엇이 아닌지도 함께 말하게 된다. 이때 구분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리고 이 구분은 본래 나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서 나타난다. 어느 순간 구분은 단순한 차이를 설명하는 언어에서 대립을 만드는 언어로 변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말은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고 너는 틀렸다는 말로 바뀌기도 한다.
이 순간 구분은 더 이상 이해의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의 경계가 된다.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선을 점점 더 굵게 그리기 시작한다. 그 선은 점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되고, 때로는 적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한 나라를 운영하는 일은 본래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의견은 공동의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구분이 강해질수록 상황은 달라진다.
서로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논의의 출발점이 아니라 편의 구분이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우리 편이 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다른 편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른 편은 곧 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보다 편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더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사회는 점점 더 분열된 구조로 흘러간다. 협력과 타협이 필요한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서로를 무너뜨리려 한다. 마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말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존재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일까.
자신을 정의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밝히는 일은 인간이 자신을 세우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반드시 타인의 부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래서 너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행위이다.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를 혼동한다. 자신의 생각을 지키는 일이 곧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일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하는 것과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동일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존재를 경쟁처럼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옳으면 너는 틀려야 하고, 내가 맞으면 너는 틀려야 하며, 내가 존재하려면 너는 밀려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존재는 본래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서로 다른 방식의 존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그 다양한 존재 방식 덕분에 풍부해진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이 만날 때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확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성찰을 통해 그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면서 이전에 당연하게 믿었던 생각들이 하나의 껍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마치 여러 겹의 투명한 알껍질 속에서 조금씩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인간의 인식 역시 조금씩 넓어져 간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머무르고, 어떤 사람은 여러 번의 깨달음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다른 존재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구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구분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구분을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구분을 통해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어 놓은 선들은 정말로 필요한 경계일까.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