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 혹은 여러 명과의 대화.
야행성인 나는 오후 10시가 돼서야 정신이 맑아졌다.
금요일에는 역시 카페에 가서 글을 쓰는 것이 집중이 잘 되기에 카페를 고르던 중에, 지금 이 시간에 대부분의 카페들이 영업종료를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 김이 샜다.
코로나 사태 이후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들이 많이 줄어든 것이 매우 아쉽다.
이런 상황에서 약간의 즐거움이라 하면, 24시간 카페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내가 사는 도시 근교까지는 차로 갈만한 거리이기 때문에.
새벽 2시 4분
버스터미널 근처에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를 찾아냈다. 터미널에 도착해도 카페를 들리기에는 몹시 피곤할 시간이다. 근처에서 자취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 열댓 명 정도만 카페에서 각자 같이 온 일행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약간 계산대가 내려다 보이는 소파로 된 곳에 자리 잡았다.
카페 통유리너머 보이는 파란 밤과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조명이 대비가 되어, 꿈속의 궁전에 있는 듯한 인테리어의 카페였다.
내가 그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카페에서 멍을 때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내 앞에 앉아있는 나의 일행이 내 뒤를 힐끔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챈 후부터였다.
나의 일행은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성이다. 단발머리의 그녀는 동그랗지만 뾰족하게 나온 턱과, 동그란 코를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지만, 양쪽의 눈모양이 미세하게 다르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시원한 느낌을 주어 마냥 동그란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녀와 나는 그녀가 요즘 배우고 있는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는데, 재잘재잘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녀가, 어느 새부터 말이 미세하게 느려지고, 했던 말의 어미를 반복해서 말하더니, 내 등 뒤에 무엇인가를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입모양으로 그녀에게 왜?라고 음소거를 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은 하지 못하고 눈빛으로 내 등위에 무엇인가를 그녀의 시선으로 가리켰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은 다음 어깨를 돌리며, 허리를 돌려 내 등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앉은자리 뒤에 하나의 자리가 더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떤 노인이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틀었던 허리를 다시 오른쪽으로 틀며, 여전히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며,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노인을 보았다. 일부러 '으아~' 하며 소리를 내며, 노인을 관찰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인답지 않은 그의 몸이었다.
언뜻 보면 마른 몸이었으나, 잘 각진 어깨와 체크무늬 셔츠의 시각적 착시를 뚫고 나오는 단단해 보이는 그의 팔뚝, 그리고 등산복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어느 젊은 남자 못지않게 가득 차 솟아 있었다. 나는 그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챙을 구부리지 않고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모자, 체크무늬 셔츠를 맨 위에서부터 첫 번째 단추까지 잠그고, 등산바지로 보이는 바지에 단정하게 넣어 바지를 한껏 추켜올렸다. 바지 밑단이 살짝 주름이 지며, 붉은빛이 도는 그의 몽크 스트랩 구두위로 살포시 떨어졌다. 어딘가 힘이 들어간 듯, 매우 단정한 옷매무새를 하고 있지만, 옷의 조합 때문인지 어딘가 어정쩡한 느낌이 있었다. 옷을 멋지게 차려입었다는 느낌보다는 단정히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의 묘하게 칼 같은 옷매무새 때문인지, 이상한 옷차림 조합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나는 눈에 안 들어왔다. 그보다도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그가 앉은자리 테이블이다.
혼자 온 것으로 보이는 그는 여러 잔의 음료를 주문했는지, 각종 음료가 테이블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를 더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나와 같이 온 그녀와 자리를 서로 바꿔 앉았다. 이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척 그를 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이번에는 그녀가 입모양으로 ' 그만 좀 쳐다봐. ' 하며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흥미롭다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이 동그란 그녀의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녀의 등 뒤에 있게 된 그 노인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백팩을 뒤적이더니 무엇인가 꺼냈다.
그의 손이 그의 가방 안에 무언가를 집고 빠져나왔을 때, 나는 약간 당황스러움과 의아함을 느꼈다.
그가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청테이프였다. 청테이프라니. 나는 갑자기 납치나 감금이 소재였던 드라마나 영화 따위들이 떠올랐다. 아, 근데 납치할 때 청테이프를 쓰던가? 갑자기 카페조명이 깜빡깜빡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르가 스릴러로 바뀌는 듯한 착각을 했다. 나는 갑자기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꺼려지게 되어, 내 앞의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따금씩 눈알을 힐끔거리며, 그녀 뒤에 그를 주시했다.
그는 갑자기 카운터로 가서 휴지를 여러 장 받아오더니, 자신의 테이블 중앙에 있는 음료들의 컵주둥이를
휴지로 살포시 덮기 시작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다. 어딘가 이상한 스타일의 단정한 옷차림의 노인이 혼자 카페를 와서 음료를 여러 잔 시켜서 테이블에 모아놓고, 컵주둥이를 휴지로 덮는다. 가방에서는 청테이프를 꺼내고 말이다. 노인은 자신의 음료들이 휴지로 잘 덮여있는지 확인을 하더니, 다시 청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당혹스러운 일은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내 앞의 그녀가 자신이 디자인한 로고를 보여준 탓에, 순간적으로 노인을 향하던 내 시선이 그녀에게로 잠시 옮겨갔을 때였다.
쩌저적!! 하며 둥글게 말려있는 청테이프롤에서 청테이프를 뜯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청테이프를 꺼낼 때부터 나는 그에게서 묘하게 불편감을 느끼던 나는 그 소리가 약간 소름 끼치게 들렸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동물의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굳이 상상하자면, 거대한 조류일 것 같은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뜯어낸 청테이프의 끝을 잡고 자신의 오른손에 두어 번 감더니 청테이프롤의 구멍에는 자신의 왼쪽손을 넣어 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노끈 따위로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이려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여차하면 ' 커피를 부어버리고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겠다 '라고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되뇌었다.
' 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 '라는 생각과 함께 긴장상태로 노인을 주시했다.
그가 다음 행동을 할 때 나는 괜한 생각이었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고,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청테이프로 자신의 몸에 붙였다 뗐다 하며, 자신의 옷에 묻은 보풀 따위를 제거하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도 뭘 제거하긴 하네. 우리가 타깃이 아니라 참 다행이네..'
갑자기 노인이 음료들을 휴지로 덮어 놓은 것이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위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휴지로 덮은 음료들이 납득이 되어, 나도 모르게 혼자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나는 다시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요즘 그녀는 로고디자인 공모전에 열심히다. 상금도 있어서 꽤나 욕심이 나는 듯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디자인이나 로고, 앰블럼등을 그리는데 관심이 있던 터라 그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에 그녀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떠났다.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나는 다시 노인에게 시선이 갔다. 노인은 자신의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있었다.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은 채 말이다. ' 노숙자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워있었지만 시선을 내 쪽으로 하여 눈을 뜨고 누워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놓고 그를 쳐다볼 수는 없었다.
중얼중얼 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을 먹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처음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술냄새는커녕 오히려 비누냄새가 진동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혼잣말을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제법 컸던 탓에, 나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없어, 몸을 기울여 그의 혼잣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처음 보게 되었다. 홑꺼풀이지만 제법 큰 눈에 눈에는 총기가 있는 듯 안광이 인상 깊었다. 이제 보니 피부색이 제법 어두운 편이었다.
태닝 한 듯 그을린 얼굴피부와 상반되게 입술은 림밤이라도 발랐는지, 건조해 보이지도 않고 윤기 있어 보였다. 면도를 아주 깔끔하게 잘한 단단한 인상을 주는 하관이 굳게 다문 듯한 그의 입과 잘 어울렸다. 나는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그의 얼굴을 멍하니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가지런히 벗어놓은 자신의 구두를 신고, 옷맵시를 확인하고는 나에게 걸어왔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가 잠시 비워 놓은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 없이 말했다.
" 무슨 일이세요? "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대답이 없는 다짜고짜 나와 마주 앉아 대답도 하지 않는 그가 좀 불쾌했다.
" 무슨 일이시냐고요. "
" 조용히 좀 해봐. " 그가 말했다.
" 네? "
별안간 남의 자리에 오더니, 조용히 좀 하라니, 어이가 없기는 물론이고, 약간 화까지 났다.
" 조용히 좀 하라니까? "
" 저 지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걸요. "
" 알았으니까. 잠깐 조용히 해봐. "
그는 그 뒤로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나에게 두어 번 조용히 하라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인사를 했다.
" 안녕하시오."
"네? 무슨 일이신데요. "
" 그냥 좀 시끄러워서 그렇소. "
" 제가요? "
웃기는 노인이다. 자신이 카페에서 청테이프를 쩍쩍 뜯어대며 한 행동을 기억한다면, 나에게 이럴 리가 없다.
"나는 군인이오. 아 정확히 말하면 군인이었지. "
갑자기 시작된 노인과의 인터뷰에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노인의 정체를 조금 알게 된 나는 늘 그랬듯이 흥미를 느끼고 그에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 전역한 군인이신가요? "
" 전역은 아니고. "
" 아 현역.. 이 시라기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올해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
" 올해 예순.. 다섯? 여섯인가? 그럴 걸세. 한 살 두 살 정도는 의미가 없는 나이라서 말일세. "
그의 나이를 듣고 나는 그가 군인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일 높은 계급이라고 쳐도 정년퇴직 나이가 63세이기 때문에, 나는 그가 그냥 미친 노숙자라고 생각했다.
" 탈영했네. 부끄럽지만 말이야. "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말은 부끄럽다고 했지만, 말이 끝나자 다시 굳게 다물어지는 입술과, 그의 맑은 눈빛에는 부끄럼 따위 없어 보였다.
" 탈영이요...?! 아니.. 탈영이요..? "
나는 처음에는 놀라서 소리치며 되물었지만, 이내 그의 공범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며 다시 물었다.
" 탈영병이니, 전역은 못한 셈이지. 신고할 텐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이래 보여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이었거든. 자네가 튼튼해 보이는 장정인건 인정하네만, 아직 자네 하나쯤은 거뜬하다네. 그러니 신고할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그보다 내 이야기나 들으며, 잠시 말벗이나 좀 해주게. 난처하게 굴지는 않겠네. "
나는 조금 살면서 만나지보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리고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을 수긍했다.
" 나는 방금 말했듯 군인이네, 아직 군인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아직 군인이라고는 생각한다네. 탈영을 한 상태지만 말이야. 계급까지는 말해주기 좀 그렇구먼. 그냥 장교였다는 것만 알고 있게나.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직업군인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네. 아직도 군에서의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네. 군인이라면 해야 하는 몸가짐이 나에게 아주 잘 맞는다네. 천직이라고 느껴. "
그의 말을 들어보니, 몹시도 단정한 그의 옷매무새가 이해가 되었다. 군인 중에서도 FM으로 하는 군인이었던 것을 보이는 노인은, 나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각 잡힌 모양새로 앉아서 대화를 했다. 그러고 보니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가 군인임을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렇게 군인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런 사람이 왜 탈영을 했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내가 드는 의문을 거리낌 없이 질문했다.
"그렇게 군인이 잘 맞았는데, 탈영은 왜 하셨죠? "
"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탈영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텐가? 아까도 당부했지만, 신고할 생각은 하지 말게. 탈영, 그러니까 군무이탈죄의 공소시효는 원칙적으로는 10년이기 때문에 형사처벌은 불가하지만, 각 군 참모총장이 정기적으로 갱신해서 실질적으로는 공소시효가 없다네. 따라서 탈영 후에는 공소시효가 위반되더라도 명령위반죄로 처벌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있다면, 신고는 하지 말아 주게. 부탁이자, 협박이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현역을 나온 터라 탈영에 대한 처벌조치는 대충 알고는 있었다.
평생 도망치며 살아도 끝까지 쫓아온다는 것을.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그가 처벌을 받는 것보다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에,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며 그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 내가 마흔하나였나, 이탈을 했으니까 거의 이 생활을 한 지 20여 년 되어가는구먼.
조용히 좀 해. 나는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었지. 모의작전이 아닌 실제작전에 투입될 정도로 나를 유명한 지휘관이었네. 지금은 군무이탈자의 불과하지만 말이야. 알고 있으니까 조용. "
" 네.. 어쩌다가 탈영하신 거예요 그래서? "
"그보다 자네는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왔나? "
"네 저는 그냥 육군만기전역했습니다. "
"그렇겠지. 보기에 결격사유가 없어 보이는 신체상태니까 말이야. 운동을 잘하는가? 내 부대원으로 있었으면, 그런 피지컬을 가진 자네를 퍽 총애했을 것 같군. 사격은 잘하는 편이었나? "
나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어물쩍 넘기며, 진짜 나의 지휘관이라도 된 듯 나에게 질문공세를 하는 그가 좀 언짢았다. 이럴 거면 그냥 미친 노숙자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군인이라고 착각하는 미친 노숙자가 팩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불편하시다면, 대화를 그만하는 것이 좋겠어요. 걱정 마세요. 저는 협박당하는 입장이니 신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
그는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다가, 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 이야기해 주지. 조용히 하게나. 나는 군인이었지만, 전우애 따위 믿지 않는다네. 전우애는 자신이 몸이 멀쩡할 때나 있는 것이지. 실제로 죽음이 목전에 있다면, 전우애 따위 듣기 좋은 단어에 불과하지. 사람이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면, 오롯이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게 되지. 그건 아무리 참 군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걸세.
작전 중에 부대원들이 지휘관을 배신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작전실패는 물론이고, 부대원 전체가 위험해지지 다 같이 몰살당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야. 내부분열이라는 것은 그런 걸세. 조직의 관점에서 내부분열은 자신을 좀먹는 암세포덩어리이지. 조직에게 고통을 주고! 지휘관이라는 머리가 수족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죽은 몸뚱이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일세. "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은 격양된 듯 언성을 높였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분노인 것으로 보이는 감정으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이내 처음 내가 들었던 것 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배은망덕한 놈들... 개새끼들. 송장에 채찍질을 해도 시원찮을 놈들.. "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원망의 에너지 같은 것이 조금 두려웠다. 그는 입술과 눈꺼풀이 심하게 떨렸으며, 그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양손 주먹이 떨리는 것이 테이블 아래로 느껴졌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으며, 욕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는 그의 목에는 핏대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마치 그가 채운 셔츠 윗단추가 그를 목이라도 조르는 듯했다. 나는 내가 마시던 차가운 음료를 그의 앞에 밀어주며, 그에게 마시라는 손짓을 했다.
" 필요 없어. 잘 마시겠네. "
그는 벌컥벌컥 내가 마시던 음료를 다 마셔버렸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말하는 중간중간에 헛소리를 하는 그가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닌 것 같아. 그가 말하는 모든 이야기에 신뢰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처음 예상했듯이 그가 그저 미쳐버린 단정한 옷차림의 노숙자라고 판단을 했다. 대화를 끝내고 싶었으나, 말하는 중간중간 혼잣말을 중얼거린다거나, 나에게 자꾸 조용히라라고 하며, 화냈다가 점잖아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대화를 끝내고 서둘러 내 일행인 그녀를 찾아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떻게 안전하게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떠날지가 고민이었다.
" 자네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는가? 몹시 신뢰하던 사람에게 말일세. "
" 저는 아직 그런 적은 없어요. 맹목적으로 누군가 믿는 편은 아니라서요. 상황에 따라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 그렇지.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지.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들도 그랬겠지. 그걸 전우애라는 쓸모없는 것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지. 나도 그들도 말이야. "
"그들이라면 작전을 같이한 분대원들 말인가요? "
나는 질문을 이어가며, 그에게서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이야기는 진즉에 내 흥밋거리에서 벗어났다.
" 부하가 상사를 배신하는 것과 상사가 부하를 배신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굳이 하나를 고른다면 말이야. "
" 두 경우 모두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인데요. 그래도 하나를 고르자면, 어렵네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배신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사가 더 그릇이 커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할 때, 화장실에 간 그녀가 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돌아와서, 이 미친 노숙자와의 대화에 틈을 만들고, 그 틈에 대화를 자연스럽게 끝내고 그녀와 카페를 떠나는 것이 나의 작전이었다.
그래서 조금 생각 없이 되는대로 뱉는 대답을 한 것이다. 나의 대답에 그를 다시 격양된 상태로 만들지는 알지 못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다시 욕지거리를 하며, 중얼중얼 되었다.
"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새끼들 때문에. "
그의 중얼거림이 점점 심해질수록, 내 몸은 자리를 서서히 벗어나려 엉덩이를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나에 미세한 움직임에 맞춰 그의 중얼거림도 더욱더 빨라졌다.
"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조용히 좀 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입 좀 다물어. 어쩔 수 없었었다고..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조용히 해 제발..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이제 나는 그와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미친 사람에게도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나라는 인간에 화가 났다.
나는 짐을 잠시 버리고 카페를 나갔다가 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셋을 세며, 화장실 쪽으로 뛰쳐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녀를 화장실에서 불러내서 자초지종은 각설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그가 안 보일 때쯤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중얼거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는 자리에서 벌떡 기립을 하더니,
누가 쫓아오는 사람처럼, 자신의 가방을 챙겨 화장실 뒷문 쪽으로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나는 진이 빠진 채로 그가 부리나케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음에도,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한참을 그가 나간 문을 보며 멍을 때렸다. 정신이 좀 돌아왔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원래 그가 앉아있었던 테이블을 보았다. 그가 남긴 휴지로 덮어놓은 여러 잔의 음료들이 덩그러니 있다.
한참 동안 그 테이블 위의 음료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남긴 음료들 속의 얼음이 녹아서 음료의 양이 늘어나 컵을 가득 채웠다. 그 때문에 노인이 음료들을 덮어 놓은 휴지들이 젖어들었다. 나는 그 휴지들이 음료들에 젖어들며 컵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휴지에 음료들이 스며들어 번져가는 모습이, 꼭 휴지가 불에 타며 쪼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앞에서 그녀가 내 얼굴에 손을 흔들어 대며, 말했다.
" 듣고 있어? 듣고 있냐고, 이 로고 어떠냐니까?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
"어? 어?! 어.. 아.. 좋네. 잘 디자인했다. 그 로고. 상금 타겠는데? "
" 뭐래, 아까부터 듣지도 않고, 무슨 멍을 그렇게 오래 때려. "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 뒤로, 그 노인이 있던 소파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뒤에 있던 할아버지, 청테이프 할아버지 어디 갔지? "
" 한참 소파에 누워서 자다가 좀 아까 일어났었는데.. 몰라, 왜? "
" 아니야.. 그냥 갑자기 안 보이길래.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좀 피곤한가 봐. 세수하고 와서도 집중 안되면, 집에 가자. "
" 그래. "
나는 카페 뒷문으로 걸어가, 문에 쓰여있는 화장실 도어록 비밀번호를 확인하고는 화장실에 갔다.
세면대에 서서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화장실 변기 칸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도망쳐야 돼. 니들이 먼저 나 죽이려 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니들은 이미 죽었잖아. 내가 죽였는데 분명.
제발 조용히 해. 니들이 잘못한 거야. "
나는 화장실을 급히 나오며 생각했다.
' 내가 몇 명과 대화를 한 것인가. 조용히해. ‘
나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