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라는 오해
카페 안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점차 커다란 웅성거림으로 변하여, 그들의 수다의 내용들이 내 고막을 빗겨나가기 시작하고, 나는 고요해진다.
나는 생각에 더 깊이 잠겨본다. 고요 속에서 검은 적막을 뚫고 한 가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잘해야 하는데,
완벽해야 하는데,
반드시 해내야 하는데.
이것은 완벽주의가 아니다. 강박이다.
강박은 완벽주의와 다르다. 간단히 말하자면, 완벽주의는 기준의 문제이고, 강박은 불안의 문제다.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 움직이는 동력원이 전혀 다르다.
완벽주의는 ‘ 이 정도로 충분하다 ‘라는 기준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태도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정확해지고 싶고, 더 나은 결과를 원한다.
완벽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아직 내 마음에 안 들어
조금만 더 다듬자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
즉 힘들면 멈출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박은 어떨까?
강박은 “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 에서 시작한다. 기준을 달성하려는 욕심보다 위험을 회피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강박은 이렇게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걸 안 하면 불안해서 못 버텨
혹시 모르잖아
지금 멈추면 무책임한 거야
못난 사람이 될 거야.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문제는 완벽주의가 강박이 서로의 언어를 빌릴 때, 우리는 둘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 완벽하게 해야 직성이 풀려’라는 문장은
사실은 ‘ 불안해서 진정이 돼야 직성이 풀리는 상태‘ 일 가능상이 높다. 이때 완벽주의처럼 말하는 강박은 우리 마음의 진단을 어렵게 만든다. 거짓된 완벽주의는 미덕처럼 보이는 강박의 가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
‘ 나는 이걸 못 해도 괜찮은가? ’
이 질문이 결정적으로 강박과 완벽주의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완벽주의는 더 나아지고 싶어서 멈추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이고, 강박은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아서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몹시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문장과 위로가 유행을 한다. 이러한 문장이 위로처럼 세상에 반복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정말 ‘ 완벽을 목표로 삼고 있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으면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상태가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는 강박적인 기준에 노출이 된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군가는 애쓰거나 누군가는 포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양극단에 존재하지만,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애쓰는 사람은 스스로를 갈아서 기준에 맞추려 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시도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
두 가지 상태 모두 ‘ 지금의 나는 충분하지 않아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포기는 게으름이 아니라 자구책이고, 애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가 아니라 기준의 재설정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완벽을 추구해서 괴로운 줄 알고, 완벽을 포기하라고 위로하지만, 실은 많은 사람들이 완벽이 아니라 안전을 원한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보다 실수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말이 필요하다.
다정한 책들이 참 많아졌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니, 책 속의 말은 충분히 따뜻하고, 문장은 흠잡을 곳 없는데, 읽고 나면 제자리에 남는다. 따뜻하고 다정한 문장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간다.
왜 그럴까? 이상하게도 그 문장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건 위로하는 문장의 문제가 아니다.
위로가 문제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지 못해, 나는 여전히 어딘가 가려운 것이다. 대부분의 위로는 내 감정을 달래려 하지만,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조건이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말은
그럴듯한 정지신호인 듯 서있다.
하지만 그 표지판 뒤에는 어떤 길로 이어져있는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괜찮다고 말해주지만, 괜찮아도 계속 참여해야 하는지, 괜찮아도 탈락해도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위로는 맘출수 있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아직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기준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강박상태의 사람에게 이러한 위로는 종종 카페의 웅성거림처럼 소음으로 들린다. 불안이 너무 커서 위로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 들어올 공간이 있다한들, 그것을 붙잡고 내 것으로 만들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러한 위로를 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나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 너는 너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 ”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이 아니라, 느슨해질 수 없는 구조에 있다.
그래서 다정한 문장이나 위로는 계속 우리에게 오지만,
사람들의 아픔은 제자리다. 위로는 전달되지만 도착하지 못한다.
이것은 위로의 공회전이다. 따뜻한 말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한 가지 질문만이 그들의 마음에 떠오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 있어도 되는가? ’
‘ 괜찮다 ’라는 말을 들어도 위로는 와닿지 않고,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우리는 나아가지 못하거나 혹은 멈추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괜찮다는 말 뒤에 정말 괜찮음 뒤에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안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는 위로의 말 뒤에 기준을 더하고자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실수해도 버려지지 않아.
괜찮아도 지금의 너는 버려지지 않아.
괜찮아도 너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아.
완벽하지 않아도 있는 여전히 넌 남아있을 수 있어.
세상에 모든 위로가 공회전하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