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본 이후의 사랑
사랑은 종종 타이밍의 문제로 설명된다.
조 블랙의 사랑 속 두 사람처럼, 분명 서로를 알아보고 끌리면서도 몇 번이고 엇갈리는 시선들. 우리는 그 장면을 운명이라 부르지만, 동시에 관계가 되지 못한 이유로 타이밍을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이밍이란 말은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덮어버린다. 감정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진심이 아니어서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는 그 말 하나로 관계의 실패를 정리해 버리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떤 감정은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 감정이 관계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관계는 감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관계를 혼동할 때 많은 오해가 생긴다.
사랑은 일방적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관계는 정의상 양방향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방향을 향해 발을 내딛지 않으면, 그것은 형성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아무리 선택했다 해도, 다른 한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장도, 회피도 아니다. 관계라는 구조의 본질이다.
이 사실을 모를 때 우리는 둘 중 하나에만 매달린다.
상대가 나를 받아줄 의향이 있는가만을 묻거나, 혹은 나 자신의 준비 상태만을 따진다. 전자는 사랑을 허가처럼 만들고, 후자는 사랑을 독백으로 고립시킨다.
하지만 관계의 양방향성을 이해하게 되면 시야는 달라진다. 나의 준비 상태와 상대의 준비 상태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놓인 구조를 읽기 시작한다.
이때 중요한 분리가 하나 생긴다.
‘형성하고 싶은 마음’과 ‘형성 가능한 상태’는 다르다는 것.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진실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안정적인가 하는 질문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것은 사랑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을 다룰 수 있는 상태인가를 묻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구조를 본다는 말은 차갑지 않다.
오히려 사랑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다. 감정이 명확하기 때문에 더더욱 구조를 보게 된다. 감정이 약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갈지를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이 지점을 허들 경기에 비유하고 싶다.
허들의 존재를 모른 채 달리는 사람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은 계속 부딪히고 넘어진다. 반대로 허들을 인식한 사람은 멈출 수도 있고, 뛰어넘을 준비를 할 수도 있다. 뛰어넘다 넘어지더라도,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서 다시 시도할 용기를 갖는다. 이것은 자유를 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넓어진 자유다.
또 다른 비유로는 가게의 거래가 있다.
어떤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못했다고 해서, 그 경험이 이후의 모든 구매 행위를 막지는 않는다. 불매는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랑도 사랑의 한 경험으로 남는다. 그것은 지위 없는 사랑이지만, 무의미한 사랑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관계를 만들지 않은 사랑도 윤리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어쩌면 관계를 만들지 않은 선택 자체가 이미 존중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서로의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에 형성이 불발되었을 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관계는 존중 없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중 없이 이어지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괴롭힘에 가깝다.
이 철학을 갖게 되면서 사랑은 덜 낭만적이 되었지만, 덜 왜곡되었다.
사랑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러나 실패를 전부 나의 결함으로 환원하지 않게 되었고, 미형성을 무가치로 해석하지 않게 되었다. 감정의 강도와 관계의 가능성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랑을 이해하게 된 후에야 다시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럽지만 자유롭게. 멈출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상태로. 감정만으로 달려가지 않기에, 오히려 사랑으로 달려갈 수 있는 길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관계는 상태와 상태의 합의로 만들어진다.
그 사실을 이해한 이후의 사랑은, 더 늦어질 수는 있어도 더 거짓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