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의 진입
어쩌다 보니 엄마랑 말다툼을 했다.
아니, 사실 말다툼이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서로의 기분이 약간 상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언어라는 것이 상호 간의 의사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쓰는 우리는 말다툼이라는 것을 한다.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고 있어도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대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주제의 마침표를 못 찍고 각자의 말만 하다가 감정이 상한다.
언어로 인해 언쟁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말 그대로 말로 다투는 행위이다.
다툰다는 행위가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말이 있듯, 싸우는 행위는 살아가는 행위 자체일지도 모른다.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
( 不戰而屈人之兵,善之善者 )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 생존을 위한 투쟁 "이라는 표현을 빌려
삶이 전쟁이라면 투쟁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말이 된다.
그 방법은 다정함이나 회피가 될 수도, 압도적인 위력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싸우지 않고 살아남는 근본적인 방법에 더 관심이 많다.
그건 아무래도 역시 이해와 소통 아닐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과 이해하고 모든 사람과 소통을 잘할 수없을 것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간혹 혼자도 잘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결국 다른 사람이 구축해 온 인간사회의 일부를 이용하며 살아가고 무리만 짓지 않을 뿐이다.
인간관계는 각 개인의 기질이나 개인과 개인이 함께해 온 시간, 가치관의 합에 따라서 가까운 사람들이 정해진다. 친밀도가 올라간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등으로 그 모습을 바꿔 나에 주변에 머무른다.
아무래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대화를 많이 했을 것이기에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해를 더 잘하게 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이해가 어렵다.
그래도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면 이해와 소통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찰과 탐구를 멈출 수 없다.
이해는 무엇일까?
일상 사전적 의미로는 ' 말, 글을 알아듣고 받아들임 '이라고 하고
인식론, 철학적 의미는 ' 지식이나 관념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일상 사전적 의미를 먼저 살펴보면,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철학적 의미로도 '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 또한 받아들이려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해라는 것은 결국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럼 서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왜?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가끔은 나를 피곤해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나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관심이고 애정이다. 더더 그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대상의 세계관으로 진입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결국 대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해는 세계관으로 진입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다.
때문에 관계에서의 이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관계에서의 다툼은 결국 세계관 충돌이고, 전쟁과도 같다.
두 세계가 하나가 되어 공존하거나, 각각의 세계가 고유성을 지키며 공존하는 방식이 바로 이해다.
사람이나 어떤 분야의 세계관을 터널로 표현해 보자.
터널은 연속적으로 혹은 비연속적으로 이어져있고,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맞게 그 각각의 터널들에 머무르며
각 터널의 세계관을 적용시키며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 밖에서 재단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이고,
결론을 내려서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의 터널을 진입하여 통과하는 행위이다.
한 세계관에서 터널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라는 것은 터널 안에서 하나의 길을 열고 지나가는 것이다. 결국 밖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걸어 들어가는 행위이다.
물론 같은 세계의 같은 터널에서도 이해의 부재가 존재할 수 있고, 혹은 같은 세계관이지만 서로 다른 터널에 위치할 경우도 이해의 부재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의 시작단계이다.
두 사람이 아예 다른 곳에 위치한다면, 혹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면, 이해는 시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관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해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멈추고, 어디에서 움직이는지를 정직하게 기록하기 위해 쓰였다.
사람들은 종종 관계를 지속하면서 느끼는 이해의 부재를 끝으로 착각한다. 이해 못 해서 떠났다고 생각하거나, 이해했으니 초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착각하는 이해의 부재는 끝도 떠남도 초월도 아니다. 그저 같은 세계관이 아니거나, 같은 터널에 있지 않음을 이해의 부재로 착각하는 것이다.
결국 이해의 시작은 위치이동이다.
당신은 상대방을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은 이해가 맞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