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위한 의심과 경계

신뢰라는 구조로 진입하기 위한 충돌

by 이수염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을 아니, 모든 상황을 의심한다. 나는 사람을 믿고 싶지만, 사람은 항상 어떤 상황에 들어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못 믿는다기 보다는

그 상황에 있는 그 사람을 못 믿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을 의심 반대편에 세워둔다.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분명 믿음이 도착할 것이라고.

그래서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직 믿지 못한 상태이고, 의심이 없는 사람은 이미 믿음에 도달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그런 공식은 거의 작동히지 않는다. 우리는 의심이 사라질 때 믿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 질 때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한다.


의심은 불신의 증거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대기권에 진입하기 직전에 발생하는 마찰에 가깝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대상에게 의심을 발생하지 않는다. 믿고 싶은 마음조차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의심은 언제나 ‘ 믿고 싶은 마음 ’ 주변에서만 발생한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확인하고, 의심을 멈추지 못할까?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흔히

“ 믿음의 기준이 너무 높다 ” 고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기준이 가리키는 것은 더 정교한 신뢰가 아니라 완벽함에 대한 기대다.

여기서 말하는 완벽함이란 의심이 0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 배신이 불가능한 구조, 선택의 결과를 되돌릴 수 있다는 안전장치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완성형이 아니라 위험이 제거된 세계에 대한 망상이다.

믿음은 본래 위험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하는 조건이다

위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은 믿음이 아니라 계산이고, 확신이 아니라 예측이다.


완벽한 믿음이 존재하려면, 상대는 변하지 않아야 하고, 상황은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나 자신 또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쌓는 인간관계 속에는 이러한 세 조건이 동시에 유지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완벽한 믿음은 감정적으로는 욕망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음의 완벽함을 갈망한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한번 믿음의 붕괴를 ‘전부’로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 조금 덜 아픈 믿음 ’을 원하지 않는다. ‘ 다시 무너지지 않을 믿음 ’을 원한다.

그래서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그들의 질문과 확인은 무의식처럼 반복된다.


이때 그들의 질문과 확인은 변질된다. 그들의 질문과 확인은 더 이상 진실을 향하지 않는다.

질문은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는 도구가 되고, 의심은 현실을 검증하는 기능을 잃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동기능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답을 들어도 다음 질문이 즉시 생성된다.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의심이라는 방법으로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을 필수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믿음의 기준을 ‘ 사람 ‘ 에게 두는 순간, 의심과 맹목적인 신뢰는 둘 다 강화된다.

의심 많은 사람은 상대의 모든 행동을 해석하고, 맹목적인 사람은 상대의 모든 행동을 면죄부로 만든다.

그래서 기준은 ‘사람’ 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로 옮겨야 한다.


말과 행동이 일관되는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루는가, 회피하는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태도는 유지가 되는지,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는 않는지.


이것들은 감정적 기대가 아니라 관찰가능한 요소들이다. 구조를 기준으로 둘 때 의심은 과잉해석 되지 않고, 신뢰는 맹목적으로 기울지 않는다.


또 하나의 핵심은 믿음의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다.

믿음을 ‘믿는다’와 ‘ 안 믿는다’처럼 on/off로 설명하면, 의심 많은 사람은 끝내 믿지 못하고, 쉽게 믿는 사람은 한 번에 전부를 내어주게 된다.

따라서 현실적인 믿음의 단계구분은

정보를 맡기는 단계,

감정을 맡기는 단계,

결정을 공유하는 단계,

약점을 드러내는 단계.

이렇게 서서히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계를 구분하면, 중간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 사람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전 단계까지만 조정할 수 있다. 이 방식은 믿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붕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믿기 위해 의심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믿음에 제한을 두는 셈이 된다.

이 부분에서 아마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 너무 계산적이고, 방어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는 믿음이 타락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믿음이 환상에서 현실로 내랴왔다는 증거다.


의심은 믿음의 방해요소가 아니라, 믿음의 형태를 세공화하는 도구다.

경계는 신뢰의 반대가 아니라, 관계를 지탱하는 지지대다.

제한은 불신의 흔적이 아니라 자기 보존의 기술이다.


그랴서 믿음은 더 이상 ‘ 완전히 맡기는 상태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의 결심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구조다. 의심은 센서가 되고, 경계는 완충장치가 되며, 제한은 안전밸브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장치가 꺼진 상태는 믿음이 아니라 도박이다.


결국 “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괴 분리 될 수없다.

믿음이란 의심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있어도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태도다.

완벽한 믿음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불완전한 믿음을 감당할 용기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기는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어디까지 회복 가능한가에 달려있다.


의심하고, 경계하고, 제한을 두면서도

그래도 건너가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어른의 믿음이고, 현실인 우리 삶 속에서 지속 가능한 유일한 형태의 신뢰이다.


당신의 신뢰관계는 어떠한 구조로 되어있는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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