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느끼는 불편의 진실
누구나 그렇듯이 살아가면서 많은 불편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특히나 내성적이었던 나는 얼마나 많은 불편감을 안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특히 사춘기로 감정이 민감했던 학창 시절에는 또래들과 다른 스타일로 옷을 입거나, 다른 헤어스타일을 하고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그 들에게 불편감을 야기시켜 미움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무리동물이기 때문이다. 무리동물, 주로 같은 종의 개체들이 모여 생활하는 동물을 말한다.
무리동물은 사회적 행동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리 중 특수한 개체나 특수한 상황은 굉장히 위험요소로 다가온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불편감을 느끼고 배척하고 미워한다.
이러한 불편감이나 배척은 생존의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도 사회적 동물로써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른 사람을 마주할 경우에 이질감을 느끼고 그것은 불편감을 야기한다. 집단에게 이질적인 것은 위험가능성, 불편함이고 그 결과로 거리두기 또는 배척한다. 이건 합리적 판단 이전의 자동반응에 가깝다. 악의도 아니며 시스템 보존 본능이다.
어떤 이가 집단규칙에 반하여 자신의 특수성을 고수하여 무리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명백하게 그에게 잘못이 있다. 그 잘못은 누구도 그의 자유나 취향 따위를 근거로 보호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리동물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특수성을 묻어둔 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다.
현대사회에 이른바 ‘ 불편충 ’들이 많은 것은 급변하는 다원성의 시대에 갈등의 기준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무리생활 중 어떠한 특수성에 불편감을 느끼는 원인이 존재론적 위협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많은 불편감은 존재론적 위협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우리는 갈등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존재론적 위협은 선별적이어야 한다.
건강한 불편감은 아래와 같다.
실제로 위협이 되는가?
질서를 붕괴시키는가?
생존이나 정체성을 해치는가?
하지만 인간의 불안은 대체적으로 이렇게 변형된다.
“ 위협의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제거하자.”
이 순간부터 판단기준은 현실이 아니라 ’ 상상된 붕괴 시나리오‘ 에 가깝다. 그 때문에 우리는 나와 다를 뿐인 취향, 무해한 삶의 방식,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선택 등 타인의 무해한 특수성에 불편감을 느끼고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방해한다.
‘ 상상된 붕괴 시나리오’는 한마디로 예방적 폭력이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존재론적 불안이 비대해진 사회는 폭력이 사후대응이 아니라 사전차단이 된다.
아직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거나, 실제로는 아무런 피해가 없어도 다만 “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 는 이유로 비난, 조롱, 규범강요 등의 도덕적 재단이 가해진다.
이러한 도덕적 재단은 존재론적 위협을 위한 방어가 아니라 자기 확신을 위한 공격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때의 배척기준은 ‘위협’ 이 아니라 ‘ 불편’인 것이다.
불편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인데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불편감을 객관적 기준인양 도덕적 재단을 하고 제재를 가하여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고 폭력을 가한다. 결국 이러한 폭력을 행하는 이들이 증명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자신이 불안하다는 것이며, 다음의 문장을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다.
“ 나는 그 존재를 이해할 능력이나 여유가 없어. “
도덕이란 원래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데, 위와 같은 국면에서는 타인을 과하게 통제하기 위한 언어가 된다. ‘ 잘못됐다’ ’ 문제 있다 ‘ ‘고쳐야 한다’는 표현으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지금 사회를 해치는, 집단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무질서한 특수성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시스템을 붕괴되지 않은 선에서 각 개개인이 행복함을 추구하기 위한 개인의 특수성을 명확하지 않은 갈등의 기준과 그로 인해 변질되는 도덕적 재단을 등에 개인의 행복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올바른 존재론적 불안 또는 위협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불안을 다룰 능력을 상실한 사회의 증상이다.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을 알 수 없을 때, 집단의 획일적 기준에 매달리게 되고, 또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무고한 특수성에 대해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여 돌파매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고한 특수성에 대한 위협은 우리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굳어져 갈수록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때,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 행복은 포기한 채 적응을 선택한다. 여기서의 적응은 평온이 아니라 지속적인 긴장상태이다. 가장 큰 피해는 자기 신뢰의 붕괴인데, 집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양 적응하고 자신의 개인적 선택을 함에 눈치를 보다가 어느 시점에는 끝없는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무고한 특수성에 대하여 사회의 병리적 배척의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질서와 갈등이 적은 평온한 상태지만,
내부로는 무기력과 냉소, 공격성이 증가하여 사람들은 타인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감시당한다고 느끼는 사회가 된다. 그 결과 개인의 감정은 억눌리고, 창의성은 줄고, 관계는 얕아지고, 개인의 삶은 행복과는 멀어진다.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감시하고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이 만들어 낸 ‘ 감정적 공산주의’ 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치료는 사회가 제공해주지 않는다. 각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불편감을 주고 있다면, 그래서 도덕이란 이름의 예방적 폭력을 가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이것은 나에게 존재론적 위협이 되는지, 실제로 피해를 나에게 끼쳤는지.
당신은 왜 누군가의 행복을 방해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