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선택된 인간인가? 선택한 인간인가?

우리의 정의와 가치관은 설명이 필요하다.

by 이수염

요즘 우리는 자주 말한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시킨다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지켜낸다고.


그 말들은 어느새 미덕처럼 유통되고,

확고함은 곧 성숙함의 증거가 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단단한 사람,

자기 신념이 분명한 사람.

우리는 그런 언어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의문이 든다.

그 정의와 가치관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충분히 많은 세계를 본 뒤 선택된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먼저 닿은 한 방향이

끝내 전부가 되어버린 결과일까.


정의와 가치관은 사실 노출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수많은 언어, 경험, 선택과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정의와 가치관에게 선택되어 살아간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 전에,

이미 그 가치들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

대척점에 있는 정의나 가치관을 만났을 때

귀 기울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알게 된 것을 맹신하고,

모르는 것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생물에게 내재된 특성일지 모른다.

안정과 생존을 위해,

익숙한 것과 확실한 것에 몸을 맡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탐구자가 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일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던 시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주장은 거센 저항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에서

아는 것 외에는 부정하거나 악으로 여긴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의나 가치관이 옳다고,

자신이 진리에 서 있다고 맹신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그 선택의 반대편을

충분히 경험해보지 않은 채

확신부터 말해버린다.

모든 가치관에는 대척점이 있다.

솔직함을 말하는 순간, 침묵이 있고

원칙을 말하는 순간, 유연함이 있으며

정의를 말하는 순간, 맥락이 존재한다.

항상 같은 공간에 남아

우리의 선택을 시험한다.


그래서 나는 확고한 신념이나

분명한 정의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한 인간에게

외면처럼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세상과 부딪히며

“여기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을 긋는 일,

그 선이 없다면 인간은

너무 쉽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니까.


동시에 가치관은 내면처럼 필요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서만큼은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

그래서 정의가 외면이라면

가치관은 중심에 가깝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서로를 지탱하지 못할 때 생긴다.


누군가를 부숴야만 유지되는 정의,

다른 존재를 망가뜨려야만

증명되는 가치관이라면

그것은 결코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신념의 구조가

내부의 밀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파괴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충돌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하는 정의는

언제나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모든 관계를

충돌의 장소로 만들어버리면

어느 순간부터는

부딪힐 곳 자체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아서 떠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말해도 닿지 않는다고 느껴

조용히 물러난다.


그때 남는 것은

승리한 정의가 아니다.

고립된 정의다.


고립된 정의는

더 이상 검증되지도,

확장되지도 않는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소멸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정의를 가진 사람 역시

끝끝내는 혼자 남게 된다.

적이 많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상대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충돌조차 일어나지 않는 상태,

아무도 맞서지 않는 정적 속에서

그 신념은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나는

대척점을 바라본 뒤에 선택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태도는

나 자신에게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맺는 모든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대척점을 본 사람은

상대를 설득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이해의 가능성으로 본다.

그 선택은 확신을 가지되,

타인을 밀어내지 않는다.


이 태도는

이해의 출발선이 되고,

대화의 윤활유가 된다.

마찰을 없애지는 않지만

부서지지 않게 만든다.


“나는 저쪽을 알지만

이 자리에 서 있다.”

이 문장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의 말은

상대를 방어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 말 속에는 이미

상대의 맥락이 일정 부분

존중받고 있다는 신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른스러움이란

정답을 갖는 능력이 아니라

대척점을 견딘 채

선택할 수 있는 여유인지도 모른다.


정의는 소리 높을 수 있지만,

가치관은 대개 자세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말의 크기가 아니라

관계가 남아 있는지로 증명된다.


결국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숴서 살아남는 정의는

결국 혼자 남는다.

하지만 이해를 통과한 신념은

조용히 관계 속에 남아

스스로를 계속해서 갱신한다.


흔들린다는 것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아직 살아 있고,

아직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확고함보다 태도를 믿고 싶다.

충돌보다 이해를,

증명보다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태도.


대척점을 바라본 뒤의 선택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 선택의 태도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함께 지켜내는 사람이

끝내 가장 오래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고 믿는다.


당신은 정의나 가치관에 선택된 인간인가.

아니면 양립하는 존재들을 겪고,

그 끝에서 정의와 가치관을 스스로 선택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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