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라이팅

장녀가 대체 뭔데

by 이계절

나는 장녀다. 둘 밖에 없는 딸 중 첫째라는 소리다.

할머니도 장녀다. 동생만 여덟인 9남매 중 첫째다.


할머니와 나를 묶는 '장녀'라는 타이틀이 싫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였던 것 같다.


할머니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부터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고 했다. 18살에 시집갈 때까지 부모를 도와 동생을 먹여살리는 게 숙명인 사람이었다. 남자였다면 공부를 시켰겠지만 첫째 '딸'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구경도 못해 봤다. 40년대에 태어난 여자란 그런 운명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첫째 딸이란, 응당 집안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뇌에 새겨져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본인의 첫째 딸에게도 의무 교육만 간신히 시키고는 함께 공장을 다녔고 막내 아들 - 나의 아빠- 하나 공부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근데 정작 막내 아들은 수능도 안 봤고 대학도 안 감)

DSC01925.JPG 일본 여행에서 묵었던 숙소. 계속 반복되는 모양새다.

장녀의 고난은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왔다. 고작 동생 하나 딸린 언니일 뿐인데, 마치 내가 이 한부모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할 막중한 임무를 가진 사람처럼 대했다. 이혼한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의 아들이니 그 아들이 책임지고 날 키워야하는 거 아닌가, 하고 묻기에 나는 너무 7살이라 따지지 못했다.


동생이 울거나 잘못하면 항상 비난은 내 몫이었다. 넌 이제 동생에게 엄마나 다름없다면서 평생 얘를 돌봐야 한다는 둥, 장녀를 가장한 노예가 아닌가 싶었다. 어릴 때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쟤는 3살이지만 나도 고작 7살인데. 문제는 워낙 어릴 때라 필터링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는 거다. 나는 이제 얘 엄마구나! 내 인생은 얘를 돌보는 데에 써야 하는구나! 이걸 적당히 걸러 듣는 건 중학생이 넘어서야 가능했다.


할머니에게 나쁜 의도가 없는 건 알지만 이해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물론 나쁜 의도가 없다는 것도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안 거지만.


40년대생 할머니에게는 평생을 그렇다고 믿고 살아온 기조가 있다. 할머니도 윗세대로부터 물려 받았음이 틀림없는 다소 비논리적인 기조가.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이렇고, 맏딸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게 이미 온몸에 스며들어 버린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난 스며들기 전에 머리가 커버려서 할머니와 자주 싸웠다. 말끝마다 '여자가~'라는 단어가 붙으면 어김없이 내 마음 속 어떤 버튼이 눌리면서 싸우게 된다.


장녀는 그냥 먼저 태어난 딸이다. 장남은 먼저 태어난 아들이고. 맏이로서 동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동생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그게 내가 일찍이 내린 결론이다. 장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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