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입학할 때는 분명 부모가 있었는데 졸업할 때가 되니 부와 조모만 남았다. 촌스러운 비누 꽃다발을 들고 해맑게 웃는 내 졸업식 사진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반쯤 걸려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당장 달려와 일으켜 세워줄만한 거리에서 지긋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유치원이라 원생이 적었는데도 학부모까지 전부 모이니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과 원장님은 이리저리 다니며 인사하기 바빠 어느 한 명에게 관심을 두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마 그 졸업식이 처음으로 느낀 소외감, 혹은 이질감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이 다른 집과는 구성원이 다르다는 이질감, 악의 없는 친구들의 질문에서 느끼는 소외감. 친구들의 질문에는 이런 게 있었다. "너네 엄마는 어디 있어?" "할머니가 엄마야?"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초등학생으로 취급받았다. 미취학 아동이라는 테두리가 벗겨져 나간 셈이다. 동생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은 막중해졌고 생각없이 놀기만 하던 자유는 적어졌다. 유난히 울음이 잦았던 동생 덕분에 나는 매일 혼나야만 했다. 어떨 때는 내가 동생을 울린 게 맞았지만.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보낸다는 건, 하루하루가 명절인 것과 같다. 남들은 추석이나 설에만 할머니표 상다리 부러지는 식사를 마주한다지만 나는 그게 일상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음식 솜씨만 좋으면 얼마든지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과영양 상태로 소아 비만이 되었다.
할머니 눈에는 비만인 손주도 당연히 예쁘겠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어른에 의하면 나는 누가 봐도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애'로 보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엄마 없는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먹여 키웠다는데, 영락없이 실패한 셈이다.
소아비만에,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나는 초등학교를 어떻게 지냈을까. 별로 유쾌한 기억은 없어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데에 꽤나 큰 기여를 했다. 대부분 '그렇게는 살지 말아야지'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이제 그때의 이야기를 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