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정안의 ‘불안메이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일도 생길 것 같이 말하고, 생기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미리 심어 주는 사람이 나인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너를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안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위험하니까, 걱정되니까 제지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정안의 불안메이커로 자리 잡아가는 것만 같다.
정안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많아서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안아.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정안이를 싫어할 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니고 꽤나 자주. 그랬더니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생길 때 자꾸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 하기 싫으냐, 왜 가기 싫으냐라고 물어보면 ”선생님이 나를 싫어할까 봐. “, ”누나랑 형아가 나 싫어할까 봐. “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에. 아이에게 도움이 되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불안한 마음을 심어주었다. 새로운 사람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정안의 마음속에 내가 넣었다. 원래는 정안의 마음속에 없던 불안함과 두려움을 넣어버린 것이다.
어느 날은 네 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보조바퀴의 나사가 풀려서 지탱해주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자전거를 타기 전 손으로 보조바퀴를 앞뒤로 흔들어 본 후 자전거를 탄다. 그러면서도 넘어진 곳을 지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아!”하며 자신을 꽉 잡아달라고 한다.
내가 정안이가 넘어진 그 자리가 되어버렸다.
부모라는 것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생기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나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꽤나 큰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는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그 불안의 이유는 달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지는 이유들은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내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말로 전달된다. 대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 불안의 이유들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넘어지지도 않은 아이에게 넘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잘 뛰고 있는데 불안을 전달한다. 아직 낮잠을 자야 하고, 자기의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52개월 아이에게 친구들이 싫어하니까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한다. 친구들이 정안을 싫어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괜한 노파심을 아이에게 말로써 형체를 만들어 전달했다. 사실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할 때만 해도 내가 하는 이 말들이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단지 그 행동을 지금 당장, 빨리 하지 멈추었으면 하는 조급하고 단순한 마음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겪으며 성장한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동반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생기는 그 감정을 해소하게 도와주는 사람이고 싶지 증폭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 정안을 키우는 시간들 동안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며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나의 속도와 나의 감정이 먼저가 되지 않도록 정안의 마음이 1번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될 수 있게 노력하는 부모가 되길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