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 국제선은 아주 한산했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에 너무 들뜬 나머지 2시간도 전에 공항에 도착해 버렸다. 김해공항이나 인천공항처럼 국제선에도 라운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곳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라운지는 없었다. 라운지뿐 아니라 문을 연 식당 하나 없었다. 제주공항의 국제선은 굳이 일찍 도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면세 쇼핑 할 곳도, 틀어진 텔레비전하나 없는 곳이다. 너무 일찍 와버렸다. 그만큼 설레었다는 뜻이겠지. 겨우 하나 열려있는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사서 먹으며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렸다.
정안은 비행기가 하늘로 뜨기도 전에 잠들어버렸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다니던 짬이 어디 안 갔구나. 여행 시작 전에 처음 겪는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정안의 여권정보를 입력하던 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때 영어스펠링을 잘못 적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항공사에 전화했더니 3만 원을 주고 이름 변경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여권을 만들었었는데 왜 스펠링을 완벽하게 잘못 알고 있었을까. 그래도 미리 알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혹시나 출발할 때 알게 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 3만 원으로 큰 거 하나 배웠다.
오사카에 도착했다.
저녁에 도착한 터라 큰 계획은 없고, 숙소로 가서 짐을 놔두고 근처 쇼핑센터에 가서 저녁을 먹고 구경을 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56개월 아들은 지금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온 곳은 늘 가던 육지가 아니고, 일본이라는 새로운 나라라는 것을 100%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사용하고, 우리나라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평상시 탈 것에 큰 관심이 없는 정안은 오사카에서 보는 다양한 전철의 모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본 라피트의 모습에 저건 엄청나게 빠른 전철이냐고 물어본다. 아이의 눈에도 저 전철은 빨라 보이나 보다. (* 난카이 전기철도의 특급열차이자 간사이 국제공항과 난바역을 잇는 특급열차로, 모든 좌석(252석)을 지정석제로 운영하며 난바역 9번 전용 플랫폼에서 발차한다. 사용하는 차량은 난카이 50000계 전동차이다. - 나무위키)
나라로 가는 2층짜리 전철을 보며 타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정안이 관심을 보이는 특이한 외형의 전철을 타지 않고 평범한 전철을 탔다. 내심 실망하는 듯했지만 어른들의 목적지에 따라가는 것이 어린이가 할 일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다. 대신 다음번 여행을 올 때는 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들을 위주로 계획을 짤 것을 다짐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정안은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탈 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데,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다. '정안은 전철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타고 난바역 가자.'라고 계획을 잡은 건 실수였다. 이왕이면 새로운 걸로, 한국에서는 해 볼 수 없는 것들을 경험시켜 주는 것이 아이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배웠다. 아이와 함께 첫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부모님들께는 이 점을 꼭 상기시켜드리고 싶다.
정안이 일본에 대해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난바역에 내려서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아이스크림 자판기의 역할이 크다. 아이스크림이 길을 걷다가 뚝딱 나온다는 것에 첫 번째 플러스 점수, 거기다 볼 때마다 엄마가 잘 사주니 그것 또한 플러스이다. 여행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든다.
잘 다듬어진 길, 오르막이 없는 평지, 번화가임에도 많이 없는 차량 덕분에 오사카는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로 보인다. 역에서 내려 숙소까지 10분가량 걸어가는데 전혀 힘든 코스가 없었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해 짐을 올려두고 또다시 걸어서 파크스 난바까지 걸어간다. 우리가 여행을 간 것은 한국이 시원해지기 시작하는 9월 중순이었으나 오사카는 8월 가장 한 여름의 제주 날씨와 닮아있었다. 그만큼 습하고 덥다는 뜻이다. 그래도 저녁 날씨는 걷기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느 도시든 쇼핑몰은 제법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외식하기 좋은 식당들이 가득해서 아이를 데리고 하는 여행에서는 필수코스가 아닐까 싶다. 따로 검색은 하지 않고 식당이 있는 층에서 문이 열린 돈가스 가게에 들어갔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 일본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식사때문이다. 아이가 잘 먹는 음식 베스트 5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돈가스, 우동, 구운 고기인데 그 모든 것이 일본에 있다. 뭐 먹이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친절한 점원이 있는 가게에는 한국어로 된 메뉴판도 있고, 아날로그의 나라 일본이지만 이제는 많이 변했다. 식당에서는 한국처럼 패드를 이용해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도 이제는 옛말. 나이가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도 짧은 영어로 우리와 소통이 가능했다.
한 끼 잘 챙겨 먹고 몰 구경을 하는데 역시 오락실의 나라, 아주 크고 재미있는 게임기가 가득한 오락실이 있다. 정안이 일본을 좋아했던 이유가 또 나왔다. 바로 오락실. 한국에서도 오락실 가는 걸 좋아하는데 여기는 더 크고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도 즐거웠다. 차가 없는 한산한 도시, 깨끗한 거리, 조용한 사람들. 오사카 첫날 여행에서 본 도시풍경이다. 도착하는 시간이 저녁시간이었다는 게 너무나 아쉬울 뿐이었다. (* 제주-오사카 직항은 저녁 도착 비행기뿐이다.) 해가 진 늦은 시간에도 걸어 다닐 수 있는 지역이라 다행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우리가 짐도 정리하기 전에 간 곳은 숙소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대욕장이다.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대욕장은 자정까지 운영하고 있어서 늦게 숙소에 돌아와서 피로를 풀기에 아주 좋았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것은 다른 여행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붐비지 않는 조용한 온천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든다. 정안은 아빠와 간 대욕장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원래도 물을 좋아하는 아이지만 대욕장을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첫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사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길도 아무것도 아닌 것도 사진으로 남겨두면 지나고 나서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의 기억이 난다. 나는 기억 못 하지만 사진은 그 기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사진이 많이 찍지 못했다. 왜냐하면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던 내 손에는 이제 아이의 손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와 글을 적으려 하니 얼마 없는 사진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여행을 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노니 어떠한 환경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으세요. 정말 많이 듣고, 보았겠지만 여행 후 남는 것은 사진이다.
아빠의 생일맞이 편지도 챙겨 왔다. 이만큼이나 자라서 생일축하카드도 적고, 같이 여행도 오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담아 늦은 밤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