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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Oct 27. 2021

라디오 듣는 여자

 최근 들어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정안이 등 하원 시간에 차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박장대소를 한 번 하고는 라디오에 재미를 들였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사실 크게 소리 내서 웃을 일이 없다. 재미있는 영화를 봐도, 웃긴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소리 내서 웃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크게 웃었다. 그것도 소리를 해서 "하하하하."하고. 그날 이후로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나에게 라디오는 십 대 시절의 추억이다. 윤종신의 두 시의 데이트를 듣기 위해 교복 셔츠의 팔 사이로 이어폰을 넣어 손을 귀에다 대고 수업시간에 몰래 듣는 불량 학생이었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기 위해 몇 정거장 먼저 내려걸어가거나 일부러 더 오래 걸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감성 짙은 소녀였다. 밤에는 영어테이프 네모 구멍에 테이프를 붙여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면 버튼 두 개를 눌러 녹음을 했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80년대 이전 사람들일 것이다.) 학습용 테이프나 정품 테이프에는 윗부분의 네모가 뚫려 있지만, 가판에서 사는 싸구려 믹스테이프나 공테이프는 위가 막혀 있어 다시 덮을 수가 있었다. 당시 좋아하던 아이돌이 라디오 게스트로 나오면 한 시간씩 녹음을 하곤 했다. 라디오가 주는 행복이었다. 아주 늦은 시간까지 라디오를 귀에 대고 잠이 들곤 했다.

 20대 초반에는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며 라디오를 들었다. 마트 상가에 있는 작은 신발가게였는데 나 혼자 있었고, 사장님이 따로 없이 마트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아주 편안한 알바 자리였다. 하루 9시간을 그곳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심심했다. 그 당시엔 넷플릭스나 유튜브같이 시간을 죽이는 것들이 많이 없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집에서 라디오를 하나 가져왔다. 80년대생이 라디오로 주파수를 맞춰서 들은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동그란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맞는 주파수를 맞춰 들었다. '지지직'하다가 갑자기 깔끔한 소리가 나오는 그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지역방송에는 문자로 신청곡을 보내 몇 번 소개된 적이 있다. 가끔은 케이크 상품권 같은 선물도 받았다. mbc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쓰고 드라이기를 선물로 받은 적도 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는 라디오 들을 일이 없어졌다. 취업을 한 후, 출퇴근길에는 라디오가 아닌 멜론 같은 음악을 듣는 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라디오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차를 운전하게 되면서 다시 라디오를 듣게 된 것이다. 

 이제는 차에서 듣는 라디오를 좋아한다. 예전처럼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며 맞춰가는 재미라던가, mp3에 내장되어 있는 라디오 기능을 위해 하나씩 버튼을 올려 가며 맘에 드는 노래를 듣기 위해 이리저리 눌러 대는 재미를 이제는 차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핸드폰 앱으로 라디오를 듣는 시대다. 원하는 방송사의 앱을 다운로드하여 그 채널만 듣는다. 가끔 차에서는 클래식도 듣고, 제3세계 노래를 들을 수가 있다. 우연히 듣는 노래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건 자동차에서만 가능하다. 좋아하는 노래가 우연히 나오는 것도, 처음 듣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노래가 나오는 것도 다양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만나는 재미가 있다. 정안을 내려주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에 올라가지 않고 한참을 차에 남아서 라디오를 듣는다.  

 가끔 라디오에 문자도 보낸다. 라디오에서 나의 번호가, 이름이 흘러나오길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나의 짧은 글 한 줄이 그날의 라디오 구성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다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고 그 이후로는 아직까지 이름이 불린 적은 없지만 계속해서 간간히 문자를 보낼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공감을 하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일이 많이 줄었다. 친구와 문자로 전화로 얘기하는 것이나 남편과 도란도란 일상을 얘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라디오는 그 자리를 채워 주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내 이야기 같아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그렇게 라디오는 혼자 있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 준다. 

 라디오의 매력은 하나 더 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밀린 집안일을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설정한 노래를 듣는 것보다 라디오를 들으며 청소하는 것이 더 즐겁다. 조깅을 할 때도 그냥 노래보다 라디오를 들으면 시간이 더 잘 가는 기분이 든다. 조금 덜 힘들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딱 12시까지만 라디오를 듣는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라디오를 시작으로 김현철님의 골든디스크로 마무리를 한다. 오전에 라디오와 함께 하는 일상이 마음에 든다. 조금 더 여유가 있어진 것 같다.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하면서 하루가 길어진 것 같으면서도 여유가 있어졌다. 하루가 조금 무력하거나 재미있는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라디오를 듣길 추천한다.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가 다른 이야기로 채워질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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