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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Aug 29. 2022

자매가 있는 집

 나에게는 2살 차이가 나는 언니가 하나 있다.

 우리는 비슷한 점을 찾기보다는 다른 점을 찾기 더 빠른 그런 사이의 자매이다. 어린 시절, 하얗고 큰 쌍꺼풀을 가진 언니와 까맣고 쌍꺼풀이 없던 나는 서로 닮은 것 같지도 않았다. 크고 보니 큰 눈에 오똑한 코나 웃는 모양이 꽤나 많이 닮았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코끼리 발목 또 비슷하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둘 다 계피를 싫어한다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정도는 비슷하다.

 어릴 때는 정말 많이 싸웠다. 물론 그 싸움의 발단은 나다. 나의 못난 성격으로 언니랑 자주 부딪혔다. 하지만 언니는 늘 착했다. 왼쪽 뺨을 때리면 거기는 아프니까 오른쪽 뺨을 때리라는 식이었다. 230의 작은 발을 가진 언니와 250의 큰 발을 가진 나지만 언니는 10대 때 나랑 같이 신발을 신으려고 245 사이즈의 운동화를 사온적도 있다. 언니의 옷은 내 옷이었고, 내 옷은 내 옷이었던 시절이다. 언니의 새 옷은 내가 먼저 입어도 되지만 나의 낡은 옷은 언니가 손도 되면 안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자연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다 커서 안 싸운 것도 아니다. 20대의 우리도 정말 많이 싸웠다. 서로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단점을 보고 지적하고 화내고 싸우곤 했었다. 매일 붙어살던 것도 아니고, 가끔 부모님 집에서 만나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싸웠다.

 머리가 다 커서 미국 장기여행을 가고 싶은데 엄마가 탐탁지 않아했을 때도 엄마에게 보내주라고 해 준 것도 언니였고, 다시던 회사 때려치우고 호주에 가고 싶었으나 엄마의 반대가 심했을 때에도 중간에서 은성이 하고 싶은 것 하게 해 주라고 얘기해 준 것도 언니였다. 결혼 후 캐나다로 나갔을 때도 부모님 걱정은 별로 없었는데 그것 또한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가 알아서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부모님께 나의 부재가 크게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22살인가 23살 때 부모님이 남해로 이사를 했다. 그때 엄마는 작은 마트를 운영했었는데 주말에 약속이 있을 때 가게를 (잠시) 봐달라고 부르면 부산에 있는 백수인 나는 절대 싫다고 거절하였지만 언니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주말에 내려와서 가게를 봐주었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언니는 지금 군인의 아내로 두 남매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참 이상하다. 사는 곳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달라졌다. 어쩌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예전처럼 싸우지 않는다. 나 역시 아내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어느새 언니는 인생의 선배가 되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어쩌면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니 딱히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30대가 되고, 둘 다 4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이제 언니의 단점을 찾아서 놀리거나 헐뜯거나 하는 일이 사라졌다. 이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한다.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고, 하나라도 더 해 줄 것이 있나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는 어릴 때처럼 한 공간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잘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의 집에 놀러 가서 침대 한편을 빌리는 일은 있겠지만 어린 시절처럼 꼭 붙어서 자는 시절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남자 형제가 없어서 남자 형제가 있는 집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같이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어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은 자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며 생기는 의문점을 물어볼 수 있는 것도 먼저 키워본 언니가 있어서 좋은 점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자매가 있다는 것은 꽤나 좋은 일이다.

 지난 일주일간 정안과 언니의 집에 머물렀다. 거슬리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당연히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데 다 내 입맛에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잔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잔소리를 하는 대신 움직였다. 예전 같으면 톡톡 쏘는 말들로 언니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댔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제주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보니 언니는 최선을 다해 나와 정안을 보살펴 주었다. 내가 중간중간하는 잔소리에도 싫은 내색 없이 움직여 준 것도 괜스레 다시 미안해졌다.

  

 아주 어릴 때, 우리가 10대이기도 전에 할머니댁에 가는 길은 4-5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때마다 무릎을 내주고 누워서 편하게 할머니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언니는 예민해서 흔들리는 차에서 오래 자지 못했다. 나는 언니 무릎에 누워 아주 오랜 시간을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기침을 너무 많이 하고, 이를 가는 내가 싫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 옆에서 함께 자 주었던 그 시간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는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어도 정서적 거리는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자주 보지 않아서 더 친해졌을 수도 있다. 옆에 있으면 소중함을 모르는 법. 정안에게 좋은 이모가 있음에 늘 감사하며 살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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