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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지 Sep 22. 2020

카트라이더라도 할걸 그랬어.

초보운전 탈출기  上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패배감을 안겨준 사건은 꽤 많았다. 패배감은 무력감, 조바심, 우울 등과 함께 때에 따라 잘 블렌딩 돼서 나를 자주 괴롭히는 감정들 중에 하나다. 그래도 그 날처럼 쓴 패배감을 맛본 날은 없었다. 흰 종이에 두꺼운 매직으로 패. 배. 감 세 글자를 크게 쓰고, 내 등 뒤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양 팔을 힘 없이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많은 자동차들을 보며 저들은 어떻게 면허를 딴 것이고, 어쩜 저렇게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인지 눈물을 한 방울씩 떨구며 집으로 돌아오던 2016년의 어느 날이었다. 면허 시험에 두 번째로 떨어진 날. 그 날은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을 통해 바라본 자동차 수만큼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갓길에 불법 주차된 차를 피해 갈 때 깜빡이를 켜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도착지점 100m를 남겨두고 나는 30점이 깎이면서 탈락했다. 두 번째라 제곱으로 쓴 탈락이었다. 그때 나는 나의 탈락이 운전 미숙이 아닌 운전학원의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운전학원에서 충분히 나를 싫어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실기를 배우던 어느 날, 정확한 안내 없이 당일 셔틀버스 운행을 할 수 없다는 학원 측에게 사전 고지를 하지 않았으니 차비를 수강생 모두에게 나눠달라고 앞장서서 말했던 사건이 생각났다. '신분당선을 타야 한다고 천 원을 더 받았는데 내가 고까웠겠구나, 그래서 나를 엄하게 봐달라고 나의 시험 선생님께 뒷말을 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2020년 지금은 세 번의 탈락은 없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운전 미숙은 게임을 통한 방향감각, 공간지각 능력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 같다. 컴퓨터를 늘 독차지하는 오빠 때문에 게임에 대한 재미와 중독을 경험하기 전에 사춘기가 와버렸고, 비교적 일찍 개인 노트북이 생긴 후에도 나는 게임에 흥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첫 노트북에는 카트라이더가 깔려있었다. 윗집 사는 내 친구 백지의 짓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백지는 한 번에 면허를 취득하였고, 졸업식 날 차를 끌고 집으로 가며 나의 우상이 되었다가 지금은 8년 차 운전자로서 나의 운전 선생님이 되었다. 내가 그때 카트라이더만 했었더라면, 차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옆문, 펜더, 뒷 범퍼까지 한 번에 세 판을 긁어 버리는 성인으로 성장하지 않았을 텐데. 사고가 난 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문했다. '이런 얄팍한 운전 실력에 왜 무리해서 차를 산 거니 왜?, 왜!'


그 시작은 드라마 촬영이었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하겠냐는 캐스팅 디렉터님의 연락에 덥석 알겠다고 했지만, 사실 콜타임에 맞춰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천 세트장까지 왕복으로 택시를 타면 돈도 돈이지만 안전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는 함께 출연한 배우님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새벽 촬영이 끝난 후라 긴장이 풀린 후 쏟아지는 잠을  떨치느라 돌아오는 길 내내 조수석에서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그 후 몇 번의 촬영과 몇 번의 오디션에서 오고 가는 길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다가 기회비용을 따져보게 되었고, 버스비보다 더 많은 차 유지비를 내더라도 배우 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차를 사는 게 맞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2016년 이후로 운전과는 서먹한 사이라는 것을 잊은 채 낸 결론이었다. 차를 사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몸속 어딘가가 싸하고, 사지가 무겁게 느껴지면서 잊고 있던 패배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어느 오디션에서 떨어진 것보다, 미팅 자리에서 은근한 인격 모독을 당했을 때 보다, 93년생 잘 나가는 스타들을 볼 때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컸던 운전에 대한 패배감을 이기기 위해 이제는 도로연수가 필요할 때였다.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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