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평
2021년 12월 28일. 오늘은 생전 처음 집을 계약하러 가는 날이다. 드디어, 아오.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오늘까지도 이체한도가 낮은 통장으로 인해 계약금을 준비하느라 애를 먹었다. 처음 하는 모든 것에서 유쾌하게 통과하는 법이 없는 나답게 벌써 이 정도의 곤란함은 n번째 였으며, 이체한도쯤이야 비교적 가벼운 문제다. 집을 구하는 것은 배우자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더니, 원룸을 구하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과정 과정이 질퍽하게 발을 붙잡아서 다음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발이 빠지지 않는 진흙땅 위에 서서 조금씩 가라앉는 구간에서는 그야말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깨고 니발도 내발도 아닌 것 같은 발을 힘껏 빼내어 다음 걸음을 걸어갈 때엔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나 왜 이 힘든 길을 가는 거니. 왜 혼자 살고 싶었니? 지금 사는 위치에 이사를 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가진(빌린) 돈으로 서울 역세권에 집을 구하려면 침대와 책상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방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역세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하였고, 우물쭈물하다가 가계약에 실패하고, 생각지도 못한 주차 문제로 마음에 드는 집을 포기했다가, 밤을 새우는 고민 끝에 다시 그 집을 계약하게 되기까지 현실과 사람에 상처도 받고 지치기도 지쳤다. '돈이 얼마만 더 있었어도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라고 잠시 생각했다가, 어떤 상황에서건 만족이란 게 어디 있겠냐며 현실에 집중하기로 한다.
상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매한 나이의 청년이 혼자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짠하셨는지 한 부동산 사장님께서 밥을 사주셨다. 가계약을 걸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집이 정말 마음에 들면 기도하며 기다리란 말씀을 하시길래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가족 중 유일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씀을 하시며 큰 따님과 동갑인 나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꾹 참고 콩나물 국밥을 후후 불어 먹었다. 비염이 있는 내가 킁킁대자 화면에 나오는 사람이 코를 흘리면 되겠냐며 치료도 권하셨다. 정말,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다.
관리비가 비싸고 강남에서 멀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가장 좋은 건 도서관이 집에서도 보일만큼 가깝다는 것, 남향인 것. 과연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내가 자취를 하는 것이 맞을까 오래 고민했다. 수도권에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라며 10년을 넘게 감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취라니. 아이러니하게도 대출금을 신청할 때도 몰랐던 이유를 무거워진 타노스 다리를 진흙탕에서 빼낼 때야 명확하게 알게 됐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마지막 이십 대를 시작하는 1월부터 올해는 빡세게 살아야 한다며 스스로 느끼는 압박감이 컸다. 서른을 준비하는 책을 빌려 읽고, 배우로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며 재테크를 배우고 파이프 라인을 만들겠다며 운동 수업에도 열을 올렸다. 안타깝게도 꾸준한 건 없었다. 별안간 그 이유를 십 년간 관리비 한번 내본 적 없는 내 방에서 찾아버렸다. 나는 책임질 게 없었다. 누리고 사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절박함이 빠진 기분이 들어버렸으니 별 수 있나 감당해보는 수밖에.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라며 여럿의 만류를 겪고, 이자와 생활비 걱정에 몇 번이고 좌절했지만 나의 의지가 더 컸기에 이 날까지 와버렸다. 첫 고지서를 받고 울며불며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그날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난방을 안 하고 살아야지. 지금부터 훈련 들어간다. 보일러 끄고, 수면양말 신고, 사랑이를 안고 잘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