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30분 분량의 시나리오를 1년 넘게 붙잡고 씨름을 해서인지, 생각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게 익숙해져서인지 아니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바빴던 건지 모르겠다. 쌈밥커플이라는 계정을 통해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을 글로 기록하기도 했지만 글을 쓰며 하루를 버티던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고3 때 가족이 된 갈색 푸들 사랑이가 점점 늙어간다. 티브이에서 보던 늙은 강아지처럼 점점 문 밖의 소리를 잘 못 들어 짖는 일이 줄어들더니 간식, 산책이라는 단어도 소리쳐야 듣게 됐다. 소리보다는 분위기와 표정으로 소통하는 노견이 된 동생을 보고 있자니 당황스럽다. 평생 우리 집 애기가 곧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건 아니지 싶다. 이러한 끝을 미리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급히 안고 동물병원에 달려갈 때마다 생각한다. 사랑이의 컨디션이 우리 엄마와 나의 컨디션이다. 가속화된 나이 듦을 보며 엄마는 시간을 두려워하고 나는 헤어짐을 걱정하는 요즘이다. 남아있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중 누가 더 슬플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뉴스를 보기가 두려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하루종일 들었던 라디오만 빈복해서 듣는다. 철장 속 개들이 불쌍해 인스타그램도 삭제했다가 또다시 깔아서 귀여운 동물들을 보는 짓을 반복한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난기류에 대한 걱정을 한다. 요즘 기후변화로 난기류가 늘았다던데 12시간을 깡통 같은 캔 안에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생각보다 큰 두려움을 안고 탔지만 무료함과 짜증을 능숙하게 숨기는 승무원들의 표정을 보고 새삼 안심했다. 그래 여기도 직장이지. 다행이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 스케줄을 가는 차 안에서 매니저한테 설마 여행 간다고 하니까 오디션 잡히는 거 아니겠지? 라며 농담을 건넸다. 작년 이맘때쯤 방콕을 갈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힐링을 주제로 하는 영화 오디션이 여행 중간에 잡혔고 우리 쪽은 가지 못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백만 년 만에 잡힌 오디션이 날아가고, 노견인 사랑이가 걱정되는 지금 나는 왜 이탈리아로 향하는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필수적인 일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시간이 돼서, 건강이 허락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자고 해서 간다. 모든 것이 여행을 위해 완벽히 세팅된 것이 아니지만 지금은 여행을 하고 싶어서 간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기 전에 글을 쓴다.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낯선 감각의 거리를 걷고, 시간 맞춰 일몰과 노을을 기다려 보고, 오직 먹기 위해 40도 더위 아래를 걷는 일을 택해보련다. 안 할 이유가 많다고 안 했던 글쓰기처럼 살아가면서 필수적이지 않다고 미루던 일이 얼마나 많았나. 돈을 벌고, 운동을 하고, 영화를 만드느라 나는 강아지가 귀가 멀어가는 것도 몰랐다. 그사이 엄마의 몸에는 혹이 곳곳에 자랐다. 8월 말 혹을 제거한 뒤 사랑이와 가평 펜션을 가자며 엄마가 밀했다. 추억할 일을 만들자. (우리 아가가 떠나면) 추억할 일을 만들자.
1시간 44분 후면 로마에 도착한다. 2주간 못 본 남자친구를 러브액츄얼리의 런던 히드로 공항 씬에서 본 것처럼 끌어안아줘야지. 그러려고 왔으니까. 언젠가 우리는 이때를 추억하며 꼭 끌어안을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