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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제니 Feb 14. 2023

이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으니까

낡은 서랍 속의 오래된 기록 #1

    내 모든 여행의 순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단 한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인도에서 한 남성과 나눈 대화를 고를 것이다.


    지금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 한 석굴사원 앞이었다 (일기장과 사진첩을 들춰보니 아잔타 석굴이었다). 인도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시점, 나와 내 동무는 어딜 가나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우리를 보는 인도인들의 시선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냥 쳐다보고 수근덕대기만 하면 다행이고, 어디에서나 노골적으로 우리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높이 들어 우리를 프레임 안에 넣 찍는 이는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우리를 신기한 배경 삼아 다짜고자 자녀를 우리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그날 그 석굴사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는 그래도 퍽 예의 바른 사내였다. 우리에게 와서 "같이 사진 찍어도 돼?'라고 묻는다.

그래, 너 잘 걸렸다.

공손하게 물어본 대가로 그는 우리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아야 했다.


"우리 여행 중인데, 너처럼 우리한테 와서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Becuase we want to share this moment with you."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큰 눈을 둥글둥글 굴리며, 동시에 싱긋 웃으그가 답했다.


댕-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낭만적인 대답을 한다고?!

이탈리아에 온 줄 알았네. 잔뜩 성 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능글맞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니 어쩌랴, 함께 사진을 찍을 수밖에.



    실제로 그의 생각은 뭐였을까. 그저 얼굴이 하얀 동양 여자 둘이 인도 바지를 입고 돌아가니는 게 신기해서, 혹는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럴듯한 거짓 이야기를 덧붙여 떠벌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멋드러지게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오로지 그 사내만 알겠지만, 그 순간 그의 저 대답은 그동안 은근히 쌓여온 불쾌감을 모두 없애버리기에 충분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이 순간을, 누군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인과 함께 나누고 싶다니.

맞아, 나도 그러려고 이 미지의 땅에 와 있는 거잖아.

그가 후에 우리와 찍은 사진을 두고 어떤 무용담을 지어냈든, 아니면 설 다음 날 바로 잊어버리고 이게 뭐야? 하며 삭제해버렸든 간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그 순간을 함께 나눴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법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꽤나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일 중에 유독 저 대화가 아직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그 큰 눈을 가진 인도인에게서 가장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고 그래서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 별 거 아닌 문장이 마음에 남아 곱씹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제아무리 많이 윤회를 거듭해 수없이 많은 생을 산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 찰나이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설 일면식도 없는 남이라 한들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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