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족 | 부모라는 빈자리

의지(依支)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by 별난애

부모라는
빈자리

나는 오랜 시간을 부모와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라는 빈자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빈자리를 느낀다는 게 소중한 존재가 부재되어 느끼는 허전하고 그리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한테 부모는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비었다’가 원래 있어야 하거나 채워진 공간이 없어져야 의미가 되는데 나는 애초에 자리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부모라는 빈자리’라는 말이 딱히 와닿지가 않았다. 부모라는 빈자리,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 살아봤어야 알 텐데 나는 그런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부모 없이도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내가 ‘부모의 필요성’을 느껴봤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딱 2번이 있었다. 미성년자일 때와 갓 성인이 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부모의 동의가 이루어져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아르바이트를 하든, 아니면 따로 살 곳을 계약하든. 그래서 나는 이때가 가장 세상에 대한 불만이 심했다. 빨리 돈이라도 벌어서 따로 살고 싶은데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안 된다는 법에, 당연히 동의를 안 해주는 부모여서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억울하고 화가 나고 답답했다. 미성년자의 신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 아니다. 미성년자라서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부모의 신경을 긁지 않는 것, 부모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사는 방법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기다린 듯이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스스로 돈을 벌게 되었지만 앞으로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당장 나올 수는 없었다. 하루 먹고 하루 살 정도도 안되었기 때문에 지금 나왔다가는 멀지 않아 바닥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참고 견디며 돈을 조금 더 모으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숨 막혀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괴로움인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고 예상치 못하게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독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정적인 수입이라곤 아르바이트였고, 최저시급으로 월세와 모든 것을 충당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돈‘을 버는 게 중요했다. 내가 먹고살아야 하니까. 누구는 부모의 돈으로 대학(교)을 가고, 또 누구는 하고 싶은 것을 과감 없이 하지만 나는 아주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니 일단 ‘돈’이었다. 부모를 탓하고 있기엔 바뀌는 것이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 내가 사는 데만 집중했다. 어찌 됐든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취업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도 부모의 존재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는 없지만 심적인 여유가 생겼고 돈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돈은 죽어도 받기 싫었다. 시간과 돈이 가난하지만 마음이 풍족해서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 알아서 잘해와서 혼자 살아도 잘 지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분명 생긴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잘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망할 수도 있는 일이고, 건강을 열심히 챙겨도 병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고, 여행을 갔다가 심하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이고 반대로 안되던 일이 갑자기 잘될 수도 있는 일이다. 살면서 나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결과가 정해지는 일이 많겠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까 아닌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처럼 내가 지금까지 부모 없이 살고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최대한 어떻게 해서든 나 혼자서 견디고, 이겨내면서 살 거지만 그런 내가 무너졌을 시에는 누가 나를 꺼내줄 수 있을까.


안전기지

그래서 나는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안전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빈자리’가 떠올랐다. 내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나를 보호해 주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 책임 회피가 아니라 ‘믿음’이 주는 ‘안정감’이 힘이 되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존재.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 부끄럽고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 혹은 내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살다가 도저히 힘이 부쳐 견디기 벅찰 때, 사는 게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등 약해져 버린 나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있을 때 ‘그래도 살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내가 아무리 강하고 단단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그와 맞먹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때까지 내 손으로, 나 혼자서 견디며 살아왔지만 나 혼자서 한 만큼 내가 못하게 되어버리면 끝나버리게 되는 거니까.

우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페어키나 백업을 하는 것처럼. 지금은 그럴 일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0.000001%의 특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걸 대비해서 하는 거고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나를 위해서.



전체보다는 ’ 일부‘로
남겨두는 것

소중한 것을 나만 가지고 있다면 그게 전부고, 잃게 돼도 전부다. 하지만 나도 가지고 있으면 일부가 되고, 잃어도 일부라 비교적 덜 타격을 받는다.

특히 혼자서 했던 시간이 오래되면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의존하는 게 어렵고 어색하다. 그리고 도움을 청해서 잘하는 것보다 차라리 못해도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나는 자라왔고 이렇게 사는 게 아직은 불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많을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동안 쌓은 시간이 무색할 만큼의 영향력이라면 나는 막아내지 못하고 무방비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나를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누군가 나를 되찾아준다면 나는 다시 생기는 거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은인이 될 수도 있다. 그중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는 부모라서. 부모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재가 변하지 않아서. 부모가 죽더라도 부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서. 그래서 부모의 존재가 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부모 밖에 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한다는 것.


부모가 그렇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존재들에게,

부모를 의지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럴 마음 없고 앞으로도 절대 없다고 장담한다. 평범한 이들이 부모를 의지하는 것만큼 우리도 그들처럼 내가 숨 쉴 구멍이 있으면 한다. 기대는 게 어렵고 어색하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미래의 나를 위해.


기대는 게 의존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살 수 이유이기도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꿈 | 포기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