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 | 내가 주체가 되는 삶

모든 건 내가 기준, 내가 알아서

by 별난애

내가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아무것도 못하는데 할 줄 안다고 떼쓰는 어린아이인 걸까?


어릴 적부터 가족에게 받은 건 ‘무시’였다. 매번 빠지지 않았던 “생각 좀 하고 말해라,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냐”는 식의 핀잔들. 내가 뭐 그리 잘못했길래, 내가 얼마나 바보 같길래 겨우 꺼내는 말 한마디에도 한숨이 따라오고, 나의 모든 행동이 평가의 대상이었다.

흔히 부모님과 싸우면 문 쾅 닫는 소심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는데, 겨우 그 집에서 숨만 쉬고 있었는데 뭐 그리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생각 좀 하고 말해


생각 좀 하고 말해라는 사람은 생각해서 나한테 더 맞았어야 했다는 둥,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냐는 둥,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나? 생각해서? 생각을 어떻게 했길래 생각해서 하는 소리들이 죄다 이런 말들일까.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냐


그리고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냐는 말. 못하는 건 사실 한도 끝도 없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많은데 그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한 분야의 전문가만 되기 위해서도 몇십 년이 걸리는데, 혹 많은 일들을 해보았다 할지언정, 오래 살았다고 할지언정 현재까지 나온 일들을 싹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대체 내가 어떤 것을 못하길래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내가 어떤 걸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거였을까?

반대로 나한테 묻는 그는 무엇을 할 줄 아는가.


이제와 결론이 내려졌지만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냐는 말의 속뜻은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 내가 미치지 못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생각한 수준에 내가 미치지 못함. 즉, 기준은 그가 생각한 만큼이다. 그의 기준에 내가 못 맞췄으니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런 무시하는 말들을 주야장천 들어왔다. 장난이 많아서 천방지축이라는 단어와 정반대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말 없고 조용하다 못해 같은 반인 친구가 “너 몇 반이야?”라는 말도 들을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 내가 대체 무엇을 했길래 말도 못 하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 걸까.



스스로 알아서


나는 그때의 내가 너무 서러워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듣기 않기로 결심하고 그들이 원하는 ‘스스로 알아서’를 보여주려 했지만 대학 졸업 때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고3 입시 당시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실업계나 직업전문 쪽으로 가 취업을 빨리 하고자 하였지만 설득보다는 강요로 대졸은 되어야 한다며 원서를 넣게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나쁘지 않았던 성적이라 어렵지 않게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고, 그렇게 들어간 교내 생활에서도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교를 놀러 다니려고 다니냐는 소리를 할까 봐 3-4년 내내 턱걸이라도 겨우 장학금을 받곤 했다. 그리고 졸업 직후 1년까지도 전공했는데 ‘당연히’ 일을 해봐야지의 압박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 해에 결국 그동안 곯았던 게 터져버렸다.


나는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기준에 못 미쳤을지 언정. 나름 신경을 썼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그동안 그래도 그들이 부모니까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거니, 다 내가 잘되라고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어찌 됐든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되새겨 왔다. 근데 그 결과 그들의 손에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었을 뿐, 내 인생에 내가 없었다. 그동안의 인생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었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고 물리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내가 했을 선택보다 나았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어 판단이 어렵지만 그저 지금이라도 ‘내 인생은 내가 살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은 분명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어떻게 되든 내가 알아서 하기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족 | 편안해야 할 집이 숨 막히는 감옥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