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밖에서 바라본 우리의 모습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 할아버지가 폐지를 주우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폐지로 가득 찬 작은 수레에 폐지를 싣다가 휘청거리는 모습이었다. 내 눈에는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았으나, 할아버지가 체감하는 종이의 무게를 난 알 수 없다. 인문학을 좋아한다며 설치고 다니는 내가, 자본주의는 잘못됐다고 말하고 다니는 내가
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 노인은 아마도 숨을 거둘 때까지 저 생활을 이어 갈 텐데.
잘 모르겠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최대한 빨리 외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보고 있으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이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책과 강의 내용을 인용해 설명할 것이다. 이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기꺼이 쓰려고 한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에 출간한 저서(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 손자 세대의 경제 가능성)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시간이 단축되어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말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주 많은 시간을 노동에 쏟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우리 노동시간의 감소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는 걸까?
'기진맥진할 때까지 시시한 일을 하다가 귀가한 뒤 좁은 아파트에서 밤늦게 편의점의 맛없는 밥을 알코올과 함께 쓸어 넣으면서 유튜브나 트위터를 보는 생활 ㅡ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월요일이 우울하다' 일을 쉬고 싶다'는 소외의 감각이 우리의 실감으로 와닿습니다.'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의 시간들.
불확실한 날 반드시 마감하게 될 그 소중한 생의 순간들은 무의미하게 소비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가 있을까.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
- 나의 아저씨 중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억지로 버티는 하루를 꾸역꾸역 적립해 가는 우리들. 우리는 통장에 쌓이는 숫자가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들을 모두 보상해 줄 수 있다는 듯 믿으며 살아간다. 축적의 끝에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 세상에 즐비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믿으며 살아간다. 마치 그렇게 믿어야만 버틸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탐욕을 반성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종업원들의 임금을 올려 주면 된다는 식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장에서는 항상 가혹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1엔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끊임없이 제품을 개선하고 신제품을 개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타사와의 점유율 경쟁에서 패배해 도태되고, 직원들의 임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효율화와 비용 절감을 추진하여 경쟁력을 갖추고 수익을 창출해야만 합니다.
즉. 자본가도 자동화된 자본의 가치 증식 운동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자본가가 자본가로 계속 남으려면 자본의 자동화된 운동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런 자본가를 따르도록 강제됩니다.'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자기 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향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만약 직원들에게 월급을 팍팍 주는 착한 사장이 있다면, 우리는 신음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자본가도, 그가 생존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야만 한다.
자본가 역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로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는 이미 노예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예제도는 분명 없어졌지만, 그 양식만 달라졌을 뿐. 우리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죽어라 공부하는 이유도, 대학에 가는 이유도, 만사를 제쳐두고 스펙을 쌓는 이유도, 어학연수, 봉사를 하는 이유도 모두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여러분 면접에 가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 특기는 심청가를 완창하는 것입니다'라고 정말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여러분 못하잖아요.
CEO나 면접관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할 거잖아. 여러분은 CEO에게 뽑히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거짓말을 해야만한다고요."
강신주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보편적 매춘이라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는 매춘부들과, 자본가에게 뽑히기 위해 '저 이것도 저것도 잘합니다.' '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상품화하는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라며 받아들인다. 자본가의 마인드를 우리 마음속에 내면화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계발서가 이렇게 성행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 것이 마치 건강한 성장인 것처럼 여기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숨 쉬고 있다. 그 속도에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을 실패자, 도태된 사람으로 규정하며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삶아온 삶을 부정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문제로 자리매김했다.
자본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다. 개개인의 고유함보다는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노동력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의 고유함은 Particularity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Singularity는 Particularity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고유함은 이득과 효율이라는 숫자에 지워져 나간다.
자본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다. 개개인의 고유함보다는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노동력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의 고유함은 Particularity로 전락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롭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소모시키고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는 것. 그런 까닭에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자기 바깥에 있다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 는 편안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은 어떤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노동자의 활동은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다.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식하는 것 등은 물론 참으로 인간적인 기능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인간적인 활동의 다른 영역에서 분리하고 최후의,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만드는 추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동물적이다.'
- 경제학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브루엄 경이 노동자들에게 외치는 소리: '자본가가 되어라!
수백만 명의 사람이 신체에 해롭고 도덕적 • 정신적 불구로 만드는 긴장된 노동을 통해서만 인색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그러한 노동을 발견한 불행을 행복으로 여겨야만 한 다는 것은 해악이다." p.60 ibid.
"그러므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산자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유산자들에 대한 봉사에, 즉 그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페쾨르: 사회경제학의 신이론 등, P.409.
"여러분은 오늘 아메리카노 대신 라떼를 먹는 게, 돈가스 대신 생선가스를 먹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죠?
삶의 시간 대부분을 그들을 위해 바치면서 메뉴 하나 선택하는 게 그게 자유예요?"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그들에게 포섭되어야만 한다. 열심히 일한다고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굶기 싫으면,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그들의 말에 따라 내 삶의 시간을 바쳐야만 하는 환경에 놓인 것이다.
이런 구조를 내재한 자본주의 속에서 '자발적'이라는 말은 참 측은해 보인다. 자본가에게 포섭되어야만 하는 구조 자체가 강제적인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자발적이라고 착각하고자 한다.
우리는 대부분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동물적 본능에 의해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이 누리는 자유가 같다면 인간적인 삶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