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밖에서 바라본 우리의 모습 3
불안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속적인 속성이며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체제의 일부예요.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혁신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생겨나요. 만성적 불안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지 체제의 결함이나 우연히 생겨난 부작용이 아니에요.
도널드 서순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불안'과 승자와 패자가 규정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절망적인 것들은
자본주의가 가진 체제의 결함이나 우연히 생긴 부작용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필연적 속성이며 메커니즘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회문제는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이 문제들은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을 만들어낸다.
'한 잔의 커피, 그 출처는 빈곤. 종이비행기 혹은 연필을 쥐곤 꿈을 향해 뻗어야 할 작은 손에 커피 향 땀이 차. Hand-drip. 고맙다, 꼬마 바리스타. 이런 현실 가슴 아프다 해. But I need caffeine, 어서 샷 추가해. 악순환의 순환계, 나의 소비는 거머리. 한 사람의 가난이 곧 한 사람의 럭셔리. 저 멀리, 내가 신고 있는 신발 만든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맨발. 내 몸을 감싸주는 따뜻함마저 역시 출처는 구덩이에 가득한 피와 뼈더미. 내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없는 자의 눈물 고이지 뒤에서. 다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해. 의식이 병이 되어버린 세상이라 그래.
출처. 아름다움이 추악함에서 왔다면 아름다움인지. Tell me.'
타블로 - 출처 중
한 잔의 커피는 누군가에게 여유를 상징할지 몰라도, 정작 그 커피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계 수단일 수 있다. 내가 누리는 여유의 출처는 결국 누군가의 빈곤이다. 물론, 커피가 단순히 여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커피가 여유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하루를 버티기 위한 각성제일 뿐이니까. 수많은 직장인들 역시 커피를 만들어주는 직원에게 샷을 추가해 달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다. 그 직원들을 보채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우리는 남들의 고통을 외면해야만 하고 또 무감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이 악순환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이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선 누군가의 불편을 이끌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는 것들의 이면에는 결국 누군가의 착취가 존재한다. AI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서버 열 발생과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정작 문명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국가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이기심과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 없는 세상을 꿈꾸기보다는 부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재생산된다.
만일 동굴의 수인을 노동자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그 수인이 바로 그림자리는 것, 그리고 수인이 동굴의 구성적 작동 요소를 재생산하는 중요한 일부라는 놀랄 만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림자로서의 노동자는 그 자신의 존재 및 그가 생산하리라 가정된 것, 그리고 (마치 상품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기라도 한 듯)
동굴을 떠난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누군가 되돌아가고자 할 때, 즉 다른 동굴의 수인이 해방되길 원치 않는다고 할 때 생겨나는 문제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런 이들에게 지식이 아닌 다른 것, 곧 이데아를 어떻게 전해 줄 것인가?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슬라보예 지젝, 프랑크 루다, 아곤 함자)
내가 무력함을 느끼는 순간은, 자본주의에 매몰된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려 애쓰는 이들보다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장을 더 추종할 때,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집단,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로 여길 때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거친 비유일지 모르지만, 마치 우리 안에 갇혀 바나나를 주는 주인을 좋은 사람이라 여기며, 우리를 꺼내 주려안간힘을 쏟는 사람을 낯설고 위험한 존재, 심지어 바나나조차 나누어주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며 공격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대학 다닐 때 한 선배가 저보고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어떤 의도로 말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보고 기차라고 한 걸 거예요.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제 갈 길 가는 놈이구나 하고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가 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내가 아무리 큰 소리로 짖어도 사회나, 이런 더러운 모습들은 그냥 가는 거 아닐까 하고요"
강신주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 자본주의에 잠식된 사람들의 삶을 구해야 한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이 잠재적 테러범이나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히는 현실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인문학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실감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나 역시 몇 년 전만 해도 이 이야기를 1분도 듣지 않고 꺼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고 분하기도 하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으로 힘을 얻고 지식으로 길잡이를 삼는 삶이다.
사랑과 지식이 내게 허용되는 한, 그것들은 나를 천상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언제나 나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ㅡ 인생은 뜨겁게 (버트런드 러셀)
이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욕을 먹을지언정 인간에 대한 연민을 포기하지 않는 훌륭한 지식인들.
노동력은 인간이 지닌 능력으로, 본래 사회의 '부‘중 하나입니다. 노동력이라는 부를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꿈을 실현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일하는 사람에게 행복감과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에 가둬 버립니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 상품을 사용하는 데에서 노동자의 삶의 질이나 꿈, 보람을 고려하는 것은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의 양입니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 마치 일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본말이 전도되어 버립니다. 노동력이라는 부가 상품에 갇혀 버림으로써, 많은 노동자에게는 인간이 지닌 능력이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되고 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주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랫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노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노동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봉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선 안된다.
그 사람이 가진 고유성이 노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일 자체에서 보람을 찾고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바뀌어야만 한다.
자본주의 앞에서는 사랑마저도 숫자놀음에 가려질 뿐이다. 사랑은 실종되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교환 가능하다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외침이 더 절절하게 들리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고, 정치가 끝나는 곳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말했던 바디우의 말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지금이다.
자본주의에 잡아먹혀 버린 이 시대의 사랑을 정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농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체제가 우리를 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약하게 외칠 것이다. "저는 한계를 지켰는데, 왜 그러세요?” 너무나 어리석고 나약한 한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허용된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만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체제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는 법이다. 반면 허용된 자유 속에 안주하는 사람은 체제의 억압을 자각할 수조차 없다. 이미 체제가 정한 한계나 금기를 받아들였으니 어떻게 억압을 느낄 수 있겠는가?'
- 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자본에 의한 소비의 자유만 주어진 우리들. 우리는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눈부신 발전으로 우리는 정말 행복해졌을까?
글의 맨 처음에 등장한 느리고 약한 몸으로 폐지를 줍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당장 바꿔줄 수는 없더라도, 내가 그들을 당장 구원할 수는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삶이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글로써 말로써 전달하는 게 내가 가진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참고 자료.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 경제학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슬라보예 지젝, 프랑크 루다, 아곤 함자)
- 김수영을 위하여
- 강신주 강연 다수.
- 위대한 수업 (도널드 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