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화음으로써
함께 영화를 보다가 같은 장면에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혹은, 말없이 같은 슬픔에 젖어든 순간도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순간 눈이 마주치고, 그 장면에 함께 잠겨든 적도 있다. 책을 읽다 같은 문장에 밑줄을 긋거나, 같은 페이지에 책갈피를 두는 일, 노래를 들으며 같은 구절에서 마음이 멈추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진동처럼 같은 결을 지나간다. 각자의 리듬으로 흘러가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조용히 공명하게 되는 순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본래 너무도 다르다. 그는 나와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마주치게 되리란 예고 같은 건 없었다. 그의 부모가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 둘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아이를 갖기까지도 수많은 우연의 연속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를 지닌 채 태어나,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랐다. 서로 다른 친구, 다른 선생님, 다른 풍경과 노래, 다른 관심사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묶이지만, 오히려 동일함보다는 차이로 설명되는 부분이 훨씬 많다.
우리는 단지 같은 행성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구인’이라 불린다. 그것은 이 행성 밖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외계 생명체와 구별되기 위한 하나의 명칭이며, 동시에 서로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를 하나의 집단으로 엮는 일종의 구심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각자의 삶에 켜켜이 쌓인,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차이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서로의 외계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끝내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참 신비롭다. 전혀 다른 행성에서 온 것만 같은 사람을, 그렇게도 깊이 사랑하게 되니까.
그 사람이 말하는 방식, 말을 건넬 때의 표정과 목소리, 눈빛,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일에 몰입하는 모습까지.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모든 태도와 몸짓이 내겐 낯설지만, 이상하리만치 깊이 스며든다.
사랑은 그 사람 눈에 비친 세상의 색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사랑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영화 장면에서, 같은 책의 문장이나 노래의 구절에 공명했다 해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 순간, 우리는 저마다 다른 기억 아래에서, 저마다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미소 짓고 있어도, 나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응시하고, 그 사람은 그 아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같은 장면을 본다 해도, 그 안에 그리는 상(像)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우리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 ‘하나가 될 수 없음’이라는 벽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낯선 이방인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고, 전혀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그 사람을 조심스레 자신의 궤도 안으로 들인다. 마치 무한히 평행할 것만 같던 두 선이, 확장된 공간 어딘가의 소실점에서 마침내 맞닿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근처로 끝없이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근처에 머물고자 하는 눈물겨운 시도의 연속이다.
언젠가 라이프니츠는 우리의 미세 지각(知覺)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바닷가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아주 작은 물방울 알갱이들이 모래에 부딪히는 수많은 미세한 소리들이 적분(積分)되어 도달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떤 물방울은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어떤 물방울은 조용히 머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연과는 강하게 얽히지만, 어떤 인연과는 평생 마주칠 기회조차 없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평생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다. 그것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힘을 지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관계는 아주 미세한 접점들이 적분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선율과 같다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선율에 얹어지는 기분 좋은 화음이 되고자 한다. 내가 들어갈 자리가 아니거나, 나만의 소리를 강하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일지라도 결국 불협화음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도 한밤중 잠을 깨운다면 그것은 소음일 뿐이다. 내가 어울릴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되면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 그리고 어울리지 않을 자리를 돌아보는 조심스러움. 이 두 마음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그것은 화음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을 가진다.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던져졌고,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 누구도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불확실한 유한함 속에서 흘러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에게 큰 행복을 선물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것들과 인연을 맺고, 또 그 인연에 의해 살아간다. 나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우리는 모두 실현하고 살 수는 없다. 인연이 소중한 이유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며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하물며 나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 동안에 행복까지 선물해 준 사람이라면 그 인연에 대한 감사함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근처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만 한다.
사랑은 결국, 내 유한한 삶에 더 나은 인연을 들이고자 하는 간절함이자, 저 사람의 유한한 시간 속에 더 나은 인연으로써 적분 되어보고자 하는 절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과,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절제 사이.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의 끝자락에, 끝내 머무르고자 애쓰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들이 모여 파도가 되고, 그 파도가 어느 순간 역치를 넘어 귀에 닿는 것처럼, 인연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실체'가 되어 내 삶에 다가와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에 대한 감사함. 우리는 그에 보답하며 살아가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화음으로 적분되려 애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