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상도’를 마치며

by 강준혁

준비했던 이야기를 모두 풀어냈다. 처음 이 글을 기획할 때,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감정과 고민, 딜레마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들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어려움도 뒤따랐다. 철학적 개념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를 명확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적인 맥락과 어느 정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설명이 자칫 사랑이라는 서사의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설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글의 방향과 색이 어긋나는 듯했고, 반대로 개념을 너무 단순화하거나 추상화하면 논리적 비약이 생기는 딜레마도 있었다. 또, 이 글에서는 철학적 개념을 단지 설명하기보다, 우리가 실제로 삶에서 마주하는 감정과 고민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철학'이란 말은 마치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어렵고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이 글에서 개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뤄보고자 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 평균 수명이 늘어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중 3분의 1은 이미 지나왔고, 과연 100세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삶의 끝을 맞이하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짧고 불확실한 여정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다. 매 순간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매 순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안정’을 추구한다. 안정은 곧 고정됨을 의미한다.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삶보다는,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일정함을 유지해 본 적이 없다. 자라나면서 외모도, 생각도, 취향도, 심지어 입맛까지도 바뀐다. 머리는 희끗해지고 주름은 늘어나며, 몸속의 세포들 또한 끊임없이 죽고, 새롭게 생성되며, 변화한다. 일부 세포는 분열을 계속하지만, 어떤 세포는 점차 기능을 잃고 더는 재생되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 부른다. 모든 존재는 생성되고 변화하며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이 무상을 깨달음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꾸게 한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가다가 반드시 죽음이라는 문 앞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불가피한 진실은 우리에게 벗어날 길 없는 거대한 허무함을 안겨 준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로봇 보급이 보편화된 2005년을 배경으로 한다. 로보틱스라는 회사에서 제작된 로봇 앤드류는 마틴 가문의 가장인 리처드에 의해 집으로 들여지게 된다. 앤드류는 리처드, 그의 아내 아만다,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지내며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익힌다. 작은 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그는 밤새 목공예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정성스럽게 조각한 작품을 선물한다.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잠기는 모습을 본 리처드는 앤드류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이후 리처드는 앤드류를 데리고 로보틱스사를 찾아간다. 그는 앤드류가 다른 로봇들과 달리 창의성과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개발자는 간단한 진단 후, 앤드류가 제작 과정 중 발생한 결함으로 ‘신경기능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균일하게 작동해야 하는 로봇에게 호기심, 창의성, 감수성 같은 인간적인 특성이 있다는 이유로 ‘결함’이자 ‘장애’로 진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는 앤드류를 단순한 기계로 보지 않는다. 그는 앤드류에게 더 많은 책을 읽게 하고, 다양한 교육을 받게 하며, 인간처럼 아끼고 존중하며 대한다. 그리고 마침내 앤드류에게 집을 떠나라며 자유와 해방을 선물한다.


앤드류는 점점 다방면으로 성장해 간다. 호기심은 더욱 깊어지고, 감수성도 짙어지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감정에 휘말리기도 한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던 작은 아씨 아만다는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시간이 흘러 리처드는 깊은 노년기에 접어든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앤드류의 딱딱하고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앤드류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인간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다. 앤드류는 인간과 닮아가려는 여정을 이어가며 외형까지 인간처럼 변화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아만다의 손녀 포샤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젊은 시절의 아만다를 꼭 닮아 있었다. 앤드류는 포샤에게 점점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아만다 역시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는, 끝없이 반복되는 이별 앞에서 무력해져 간다. 그리고 언젠가 포샤마저 사라질 것임을 직감한 그는, 마침내 결심한다. 자신의 기계 부품을 모두 인공 유기 생체 조직으로 교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영원을 버리기로.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어감을 택하기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앤드류는 말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조화보다, 하루를 살고 향기를 남기는 생화가 더 아름답다고. 끝없이 켜져 있는 조명보다, 잠시 세상을 물들이고 사라지는 노을이 더 소중하다고. 텅 빈 무한함 보다는 의미로 가득 찬 유한함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더 오래 살기 위해 애쓰고,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 손에 쥔 것을 꽉 쥔 채 살아가는 우리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기만 한 걸까? 앤드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그 순간순간 존재하는 것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앤드류는 깨달은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허무를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순간의 특별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해가는 세계, 무상한 세계 속 그 찰나를 사진 속에나마 붙잡아두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상한 삶 속에서, 사진처럼 내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될 '영원한 현재'를 선물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삶을 진정 ‘살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사랑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한다. 아니, 사랑이 우리에게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을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은 결국, 나를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그 임계점에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사랑이야말로, 탁해지는 세계를 다시금 아름답게 채색해 나가는 유일한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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