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엇박자에 익숙해지는 일

인간적 인간, 인간적 사랑

by 강준혁

몇 년 전, 어디선가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자식에게 부모란, 역할 모델이자 동시에 전복해야 할 체제다.’

한 생명에게 가장 처음 세계를 열어주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부모는 든든한 울타리이자 좋은 거울이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 없이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힘이 있어야 하기에, 결국 자식에게 부모란 울타리를 벗어나 넘어야 할 체제이기도 한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보살핌은, 때로는 사랑이란 이름 아래, 아주 은밀하게 권력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사랑과 걱정이, 어느 순간 자식을 ‘내 뜻대로’ 이끌려는 의도치 않은 권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사랑이 너무 모자라면, 자식은 방어기제로 자신을 둘둘 감싼 채 자라게 되고, 사랑이 지나치면, 자식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올 기회를 놓치거나, 여전히 부모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아이로 남게 된다.


흔히 사랑은, 많이 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겨지지만, 정말 그럴까? 지나친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람의 행복을 앗아갈 수도 있다. 갈증이 날 때 마시는 물 한 잔은 소중하지만, 이미 해소된 갈증 위에 계속해서 물을 들이붓는다면, 그것은 고통이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소개팅 자리에서 남자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할 때, 상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사를 무시한 채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그 배려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 스스로를 ‘오늘 멋지게 배려한 사람’이라 여긴다면 그 순간 그는 사랑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접어든 것이다. 배려란, 내가 얼마나 주었는가’가 아니라, 그 마음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았는지를 끝까지 묻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통했던 방식이라 해도, 그것을 정답처럼 반복해선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다 좋아하더라’는 믿음 아래 강요되는 친절은, 결국 폭력과 다르지 않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방식이든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순간부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 가까이 다가가기보다는 잠시 멈춰서는 것, 더 많이 말하기보다는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 더 깊이 스며들기보다는 그 사람이 숨 쉴 여백을 남겨주는 것.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멈춤을 통해 다가서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사랑일지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의 따뜻함, 지금의 친밀함, 지금의 설렘이 영원히 지속되길 꿈꾼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사랑은 생물처럼 자라고, 계절처럼 변하며, 때로는 낯선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이 항상 같은 표정을 짓기를 바라고, 한때의 빛나는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사랑이 변하는 징후 앞에서 우린 고통받는다. 그 변화는 때로 아주 작고, 아주 조용하게 찾아온다. 그 사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달라졌다는 감각, 더 이상 같은 언어로 닿지 않는다는 체감. 이 변화는 ‘사랑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 조짐을 견디지 못한다. 무너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늘 같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허무함과 분노 속에서 사랑을 지키기보다 소유하려 하고, 사랑을 들여다보기보다 통제하려 하며, 변화를 수용하기보다 거부하려 든다. 어쩌면 가장 폭력적인 사랑은,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한 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영원히 동일하게 반복되리라는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건 상대가 아니라 언제나 ‘내 마음’ 그 자체다. 사랑이 순수하지 못한 건, 누군가가 받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끝까지 순수하게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실망하고 섭섭해한다.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받아주지 않아서다. 그 마음은 섭섭함으로 식고, 섭섭함은 기대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기대는 강요로 형태를 바꾸고, 강요는 마침내 집착으로 굳어진다. 그 순간부터 사랑은 더 이상 ‘주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는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듯 보이지만 실은 내 안의 불안과 욕망, 결핍과 이기심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감정들, 말로 다 표현되지 못한 불만과 두려움,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 내 마음을 떠다니던 파편들이 어느새 말투에, 표정에,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결국 그 사람을 조용히 옥죄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방식조차 사랑이라 믿으려 한다. 마음을 쏟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위했다는 말만으로 그 왜곡된 전달을 정당화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의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그것이 어떻게 닿았는지를 끝까지 물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실제로 해내고 끝까지 지켜낸다는 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마음을 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애는 쓰고 있지만,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 마음은 분명 그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현실에선 공회전만 반복되는 듯한 느낌.


우리는 앞으로도 수없이 넘어질 것이다. 진심으로 위하고 싶은 마음과 이기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그 마음에 지고 말 것이다. 인간은 강하지 않다. 옳다고 믿는 것과 내면의 충동 사이에서 언제나 이길 수는 없다. 내 이기심, 소유욕, 불안, 결핍,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들. 그 모든 것들이 거대한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 시도, 휘청이면서도 다시 발을 내딛는 그 마음, 그 불안정한 균형감각이 사랑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줄 것이다. 그 순간의 흔들림조차, 사랑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발버둥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사랑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살고자 애쓰는 그 의지, 바로 그 태도가 우리를 진짜 인간답게 만든다.

아무리 거대한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감정들이 있다 해도, 그 힘에 저항하려는 의지,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더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 마음, 그 불완전한 리듬, 엇박자야말로 사랑이 제 속도를 가지게 되는 방식이자 사랑의 고유한 리듬일 것이다.


자기 속도는 스스로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지 않으려는 그 선 안에 생긴다. 떨어지는 쪽으로 향하는 흐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려는 마음. 그 의지가 만들어내는 선만큼, 사랑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바로 그 미묘한 지점에서, 사랑은 끝내 제 자리를 지킨다. 비록 제자리에 고요히 머무는 듯 보여도, 그 사랑은 그 자리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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