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내 결혼식이 끝나고도 한 달이 넘게 살아 계셨다.
결혼하던 해 1월 어느 날 외출하시는 아버지를 보신 어머니께서 배가 왜 부르냐는 말씀에 요즘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셨다. 병원에 갔다 오라고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오늘 할 일이 많아서 가 봐야 한다고 하셨다.
제차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오늘, 병원에 가봐요. 이상하니까."
얼마 못 가서 볼 일 못 보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소리를 듣고, 큰오빠
내외와 어머니와 함께 큰 병원 두어 군 데 들렸다가 집에 돌아오셔서 자리 보존하고 누우신 지 두 달여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는 '전주 이 씨 0000군파 대종회 4대 회장' 이셨고 '봉향회'라고 하는 '왕릉'의 제사를 주관하는 기관에서 5곳의 왕릉을 담당하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당시 릉을 보수 수리를 하고 계셨다.
식구들은 아버지께서 암이 걸렸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자세히 알리지 않았다.
동네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 나와 내 약혼자가 나이도 차고 돌아가시면 많이 늦어질 테니 미루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빨리 결혼하라는 말에 원래 3월 1일 결혼식 날짜를 12일 앞당겨 2월 16일로 잡았다.
"내가 2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릉을 다 보수할 수 있을 터인데."
어느 날 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밖으로 들렸다.
"당신, 암이요. 못 산대요."
"뭐?"
그 후론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결혼식이 다가왔다. 내 결혼식에 아버지께서 참석하지 못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내 손을 잡고 들어간 사람은 큰오빠였다.
폐백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에 없다. 급히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오는 낼 오는 낼 날마다 아버지께서
생사를 넘기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짐 근처까지 왔는데 갑자기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가신 것 같은 생각에 우리는 급히 대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 쉰다. 됐다."
정말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와 남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냥 마음에 서늘한 만 오고 갔다. 어머니는 우리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의들 보려고 못 가신 게구나."
식구들도 너나없이 한 마디씩 했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
"막내딸 결혼식에 못 가셔서 서운했나 보다."
"결혼한 날이 아버지 제삿날이 될 뻔했네.'' 등등
그래도 결혼식이 끝나고 위기도 넘긴 것 같으니까 집에 있지 말고 연락 닿는 곳에 가 있으라고 해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조선시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정사 건 야사 건 어느 박사가 와도 무릎을 꿇을 만큼
해박하셨다. 남편은 틈틈이 아버지께 조선에 대해 질문하고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장인어른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정말 충격이야, 어찌 이런 일이--. 조금 더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터인데--."
눈을 지그시 감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 아버지 쉰한 살에 내가 태어났는데 나는 중학교 들어갔어도 아버지와 장난을 칠 때면, 옛날 사람치곤 등치가 있으신 아버지 어깨는 내 놀이터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딸이 시집간다고 했는데 말씀은 안 하셨지만
결혼식을 못 보는 심정이 헤아려져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