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이 오면 아버지는 토정비결을 보는 책자를 사 오셨다.
'책력' 이라는 빨간 표지의 책자와 하얀색 책자 두 권을 사 오셨다. 식구들은 그 책자를 받아 들고 반가워서 한 자리에 모여 책을 보며 한 해를 설계했다.
빨간 표지의 책자에서 음력으로 태어난 해, 월, 일에 적혀 있는 숫자를 백의 자리, 십의 자리, 일의 자리에
놓고 조합하면 백의 자리 수가 나온다. 그 수가 적힌 페이지(page)를 찾으면 그 해의 운세를 볼 수 있다.
더 자세히 보는 책이 하얀색 책자이다. 빨간색 책자에서 찾은 수에 맞추어 페이지를 찾으면 반 페이지 또는 한 페이지 정도 빼곡히 한 해의 운세가 적혀 있다.
뭐 그리 특별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올해는 좋다 나쁘다 00병에 조심해라 물가에 가지 마라 귀인을 만난다 손재수가 있다 등등.
우리 형제들은 둘러앉아서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서로의 운세를 봐주었다.
한 해를 설계하며 웃고 즐기던 그런 시간이었다. 책을 사 온 며칠 동안 보고 또 보고 자신의 운세를 가슴에
담고 그 해의 계획을 짜 보던, 아버지가 가져다준 하나의 놀이 문화였다. 그러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나의 결혼 날짜는 어머니가 잡으셨다. 그때도 어머니가 참고로 본 책자가 그 빨간색 책자이다.
자세히 모르지만 우리가 보던 한 해의 운수를 뛰어넘은 그 무엇이 그 빨간색 책자 안에 있었다.
육십갑자를 따져 어떤 날의 날짜를 잡는 것 같은 거 말이다.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이셔도 그 빨간 책자를 당신 서랍에 넣어 놓고 보셨다.
종교에 관계없이, 과학에 관계없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간단하게나마 생활 깊숙이 길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화에 익숙한 나는 그 보다 더 나아가 이사를 하려면 손 없는 날을 찾고, 신문에 있는 오늘의 운세를 보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지주였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시고, 이맘 때면 길에서 팔던 그 빨간 표지의 책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에 남아 어릴 적 아랫목 이불속에서 꼬물대던 그리움을 불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