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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뿌염할 때가 되었네.

무지개다리 너머로 네가 떠나고

by 땡스thnx
누나 염색하고 올게.
큰누나랑 잘 놀고 있어.

'아이고, 염색한 지가 언젠데 이젠 한 달을 못 버티는구나' 싶은 것이
이제 그냥 백발로 살아버려? 하는 생각을 해가며 집을 나섰다. 벌써 반년째 아픈 강아지를 언니에게 맡겨두고.


헤어 디자이너와 '내 하얀 뿌리를 이렇게 계속 물들여야 하는 것인가 자꾸만 회의가 든다'는 이야기와 '요즘 강아지가 아파서 걱정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냈다.


그즈음은 집을 비우면 마음이 불안했다.
그 사이에 우리 뽀리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자꾸만 언니에게 '뽀리는 뭐 해?' 메시지를 보내고 언니는 안심시켜 주려는 듯 곤하게 누워 자는 강아지 사진을 보내주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염색을 마친 그날, 바로 집으로 갈까 하다가 마트에 들러 뽀리가 좋아하는 귤을 한팩 샀다. 우리도 아플 때 입이 쓰면 상큼한 게 먹고 싶은데 강아지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 없이 귤을 사고 후다닥 집으로 뛰어간다.


역시나 언니 무릎에 기대 움직임 없이 눈알을 빙글 나를 바라보는 뽀리.
휴- 잘 있었군. 살아있어!


귤을 꺼내 속껍질을 까고 과즙을 마음껏 즐기도록 먹여본다.
츄릅츄릅 잘도 먹네. 고마워 잘 먹어줘서 :)

나도 하나 껍질을 벗겨 입안 가득 씹어본다. 과하게 단 그 맛, 미국산 만다린이라나-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 식사를 하고 숟가락을 탁, 내려놓자 언니 무릎 위에 누워있던 뽀리가 성큼 일어선다. 뭔가 결심이나 한 듯이.


일어나 화장실로, 현관으로 다녀온 뽀리는 잠시 후 비틀거리다 내 무릎 위로 왔다.

그리고 몇 번 울더니 툭 하고 고개를 떨궜다. 이렇게 가는구나.


한 생명의 임종을 내 품에서 온전히 품고 받아들인 것이 처음이라 생명이 조금씩 사그라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고자 하는 모습과 스위치가 하나 둘 꺼지는 모습을 온전히 지켜봤다.


청각이 가장 오래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들려주리라 생각했었다.


"뽀리야 고마웠어. 사랑해. 누나가 뽀리 정말 좋아했어"라고 말해주고 언니에게 부탁해 찬송가를 틀어줬다. 이 노래를 너는 끝까지 들었을까? 이승에서의 마지막 단맛을 너는 충분히 느꼈을까?


그렇게 뽀리를 떠나보내고 어느새 한 달. 귀밑 머리가 어느새 하얗게 변해있다.


또 뿌염할 때가 됐네.
무지개다리 너머로 너를 보낸 지 한 달

나는 참 뽀리를 좋아했다. 뽀리를 그리기도 하고 뜨기도 하고.

하얗고 몽글몽글한 실을 보면 늘 뽀리를 생각했다.


뽀리의 마지막 길엔 언젠가 떴던 뽀리 얼굴을 놓아줬다. 누나가 너 정말 좋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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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뜨개 하면 뽀리는 가만히 앞에 와서 움직이는 바늘을 바라보곤 했다. 실에 코를 박고 킁킁대기도 하면서. '이만큼 봤으면 너도 떠봐, 이제 할 수 있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던져도 그저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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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리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이 친구에게 옷 한 번 떠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곤 급히 뽀리를 위한 옷들을 떴다. 산책도 어려워 병원행 나들이뿐이지만 기분이라도 산뜻하게 가져보라고, 그래야 누나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몇 벌을 떠보며 봄에 입을 수 있겠지? 가을에 입을 수 있을까? 더 먼 미래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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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바늘을 들어도 앞에 와줄 네가 없구나.

네 의사도 묻지 않고 다음 생에 또 만나자고 실로 인연을 엮어본다.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우리 뜨개친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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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뜨개메이트 뽀리가 무지개다리 건넜다는 이야기를 sns에 공유했더니 같은 아픔을 겪은 분들이 위로와 공감의 댓글을 남겨주셨다. 시간이 지나도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분들과 아픈 친구를 돌보며 다가올 이별에 힘들어하는 분들 등등 댓글을 읽으며 나는 또 한 번 폭풍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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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 그야말로 볼꼴 못 볼꼴 다 공유한 17년 지기 친구를 보내고 어느덧 한 달.
감정이 좀 추슬러졌을까 긴 글을 써봤지만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 다음 뿌염 때는 눈물이 좀 마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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