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이 떠졌다. 크리스마스이브이자 휴일 아침이긴 하지만 일찍 잠이 깨었고 잠자리를 뒤척이다 충전 케이블이 꽂혀있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작은 스마트폰 창을 통하여 여러 세상이야기들과 소식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폭설과 한파 뉴스, 내년도 예산안 뉴스, 이태원 참사 뉴스, 계파와 정당 뉴스 등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 날 누군가 흥분하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듣지 않은 일들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은 얼마나 조용할까? 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누군가가 보고들은 것들을 그 누군가는 기사화하고 TV와 온라인을 통해 전달하는 일들이 대부분인 것을. 그것들에 치우치지 않고 검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진실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전날 나는 서점일을 그만두었다.
전화기 벨이 울렸다. 이른 시간에 전화하는 사람은 형이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집에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어제 형과 통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 통화에서 관리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흥분하여 통화한 내용이 상기되었다. 그러잖아도 집에 갈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 후 형으로부터 여섯 번의 전화가 더 걸려 왔다. 날씨가 추우니 다음에 와도 된다. 바쁘면 다음에 와도 된다. 와서 식사는 같이 할 것이냐. 생수를 구입해야 한다 는.
형의 대화 중 특히 “다음에 와도 된다.”는 말은 “꼭 와야 한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형은 불안정한 상태가 클수록 역설적인 표현들을 많이 쓰기 시작한다.
형의 집에 도착해 보니 잔뜩 흥분해 있었다. 혼자 사는 작은 영구임대아파트에 관리비가 10만 원이 넘게 나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관리비 고지서를 보여 달라고 해서 확인해 보니 13만 원이 조금 넘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2만 원 상당의 보전금과 3만 원 상당의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을 제외하면 8.1만 원이 되었다. 나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확인시켜 줬지만 형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노트를 달라고 했고 고지서 뒷면에 있는 관리비 부과현황의 금액들을 일일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형에게 같이 계산해 보자고 했다. 형은 완강히 거부했다. 형은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을 아파트관리실에서 빼돌리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형에게 이걸 같이 계산하지 않고 오해가 계속해서 쌓여간다면 더 크게 안 좋아질 수 있다고 설득했다. 형에게 노트에 옮겨 적은 금액들을 나에게 불러달라고 했고 나는 휴대폰 계산기에 그 금액들을 입력하며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전금과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을 감하자 8.1만 원의 금액이 나왔다. 그제야 형은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이 본인에게 온전히 쓰였음을 인정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수도계량기에 동파용 열선을 설치했다는데 냉수와 온수 두 군데 다 설치했다고 했다. 그런데 온수에 동파용 열선을 설치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동파방지 열선은 자신을 도청하려는 수작이라고 했고 동파용 열선이 정말 동파방지용인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직접 나가서 수도계량기에 설치되어 있는 동파방지용 열선을 확인해 보자고 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 우측 벽에 수도계량기가 있었고 우리는 스테인리스로 된 계량기 뚜껑을 열고 충전되어 있는 하얀 인공 솜을 끄집어내었다. 상단의 냉수와 하단의 온수용 계량기에 설치되어 있는 동파방지용 열선을 형에게 확인시켜 줬다.
그리곤 관리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는 겨울이 되면 난방비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전기장판하나로 겨울을 나고 온수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온수를 사용하지 않으면 온수가 공급되지 않아 수도가 동파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형에게 들려주었다. 형은 그래도 석연치 않은 모양이다.
형이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것은 예전에 성남동에서 버스사고가 있으면서부터라고. 버스에 탑승 후 달 리던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넘어졌다고 했다. 그리곤 통증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면서부터 라고 했다. 버스회사 관계자는 형에게 약간의 보상을 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보상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했다.
***에필로그***
법률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작고 소소한 오해와 갈등들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형을 비롯하여 우리 주변엔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한다. 꼭 장애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성향이 착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다. 불이익을 당해도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만 끙끙 앓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경청하고 대변하는 과정은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듣지 않은 남의 말을 옮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승산이 없는 갈등일지라도 약자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행위는 시도라도 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