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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Oct 23. 2023

중립과 인간성

 요즘 2주에 한 번 모이는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책은 추천과 투표를 통해 정해지는데, 책을 추천한 사람이 발제를 도맡아 정리하여 질문을 올려준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기에 책에 대한 평가나 주제가 매번 다르지만,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평소 알지 못했거나 읽으려고 마음만 먹었던 책을 집어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칙에는 종종 문제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지난주에 읽은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이 그러했다. 해당 책에서 한 부분만 집어내 보겠다.

 고고학자들과 고인류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마주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했다. 현대 유럽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두 종은 짝짓기를 하기도 했다. 현대 아프리카인들의 살과 뼈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유래한 DNA가 없지만, 유럽인은 많게는 4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지니고 있다. 두 종의 만남 이후 수천 년 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지만, 우리의 게놈 안에는 여전히 그들의 메아리가 남아있다. 두 종이 만났을 때 울려 퍼진 그 메아리는 강철에 부싯돌이 닿을 때처럼 불꽃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새롭고 다른 것들이 한데 섞이면서 우리는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 혼합물에서 한없는 창조성이 마법처럼 피어났다. 최초의 음성 언어와 완벽에 가까운 도구 제작 기술, 인류가 만들어낸 최상의 예술품들이 그것이다. 달과 별로 가는 길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첫 자손에게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p.138

 물론 책 전체가 저러한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저자는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 있는, 우리에게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유적을 가져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풀어나간다. 가족이나 집부터 기억에 관한 벽화, 채집하고 수렵하는 이들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는 이야기다. 제목은 그보다 과장된 느낌이 강하지만 고고학에 흥미가 생길 정도로는 충분하겠다.

 그러나 나는 작은 부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라는 단어가 번역 과정에서 혹은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 실수일 수도 있다. 저자가 영국 고고학자이자 역사가라는 정보에 의한 것인지 혹은 내가 영국인이 아니라서 이러한 부분에 의구심을 가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신비로움’이라는 말이 미적으로만 판단함으로써 다른 문화를 낮춰보는 경향성임을 얼핏 읽기도 했다.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러한 인식을 보다 자극적인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왜 불편함을 느끼는가, 편향과 중립에 대해 생각해볼까 한다.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로서 중립은 중요하고 또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가정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자라느냐에 따라 마음 깊은 어딘가에서 세상에 대한 전형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러하고 어머니는 저러하며 가족은 이러한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생각처럼, 내 세계는 내가 경험한 만큼의 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내 전형은 편향적이다. 그래서 중립은 지향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단순한 판결이나 사건의 결과에만 붙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편향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말에 비해 평온하지 않다. 구별보다는 구분에 가까운 사고가 흔하고, 다름과 틀림이 뒤섞여있다. 심지어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르기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의도하건 의식하건 상관없이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매력적이고 통쾌한 악이 있을지언정 그들은 모두 분리된 책과 영화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악당은 언제나 타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켜야 할 선을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시선을 끌기 위한 뉴스의 몸부림인지 아니면 절대적으로 그 수가 늘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엔 더더욱 빈번하게 접한다. 더러는 치가 떨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분명 SNS는 아예 하질 않으며, 뉴스를 최대한 끊었음에도 하루가 멀게 답답한 일들이 눈앞에 밀려든다. 상황을 보아서나 사람이라면 응당 하지 말아야 하는 말과 행동이 화면과 스피커에서 튀어나온다. 이들은 영상과 말로 다듬어진 상품이 되어 조회수라는 값을 달고 세상에 뿌려진다. 미세먼지처럼 사방을 뿌옇게 채운다. 지켜보며 느껴지는 이것은 단순한 분노보다 불쾌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나는 특정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말을 보면 가슴이 조여 온다. 현대 아프리카인과 달리 현대 유럽인만을 ‘우리’라 하고, 그 안의 창조성과 기술을 칭송하는 책의 한 문단처럼.

 이 불쾌감의 원인은 단순한 편향이 아니다. 중립적이지 않아서 라거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으며 논리가 모호한 말과는 결 자체가 다르다. 자신도 옳음이 아니라 자신 옳음처럼, 여기에는 이기심과 배타심이 숨어있다. 자신의 성공만을 기반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이들을 ‘꼰대’라 부르고 피하려는 이유와 같다. (쾌와 불쾌는 날씨나 분위기 혹은 냄새처럼 공간감을 지녀서, 분노에 휩쓸려 대상을 부수기보다 피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가운데로써 중립이 아니라, 자신만이 세상 중심에 섰다는 중립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러하진 않을까, 싫은 장면을 떠올리면 자꾸만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간단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규칙, 가령 경청하기나 수용하기 등을 단순히 외우던 때도 있었다. 때마다 후회는 변화를 증명한다지만 나는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단순히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싶었을 때도 떠오른다. 내가 듣기 싫으니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거쳐 사람이기에 지켜야 할 것, 양심과 인간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람이라 드러나는 성질보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다.

 문득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문학은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설명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근래에 들어 인문학에 목마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참고로 한글로만 쓰인 부제는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이다. 영어 원제인 <Wisdom of the Acients>보다 어딘가 많이 부푼 느낌이다. 표지와 제목에서 책이 얼마나 팔릴지 결정된다고들 하니 으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그나저나 독자로서 나는 어찌 되었든 그 생각에 도달한 걸까나.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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