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6 심층심리학 - 김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1)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사회, 문화적 가치관 속에서 계급장 혹은 마스크를 부여받는다. 예컨대 나는 교수다, 나는 목사다, 나는 무엇을 성취했다 같은 정체성이 스스로를 규정짓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정이 점점 견고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역할이나 책임감이었을 수 있지만, 어느새 그것이 나를 옭아매는 무거운 껍데기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계급장을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 계급장들이 오히려 자기 내부로 깊이 들어가는 길목을 틀어막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내면에 켜켜이 쌓인 상처, 트라우마, 억눌린 감정들은 마치 둑 뒤에 쌓인 물처럼 거대한 무의식의 영역을 형성한다. 칼 융이 말한 그림자(shadow)란, 그처럼 우리가 의식에서 외면해온 무거운 침전물이다. 보통 공개적인 곳에서는 반짝이는 마스크를 쓰고 활보하지만, 개인적인 곳에서는 문득 방심하는 순간에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누구에게나 이런 '분열된 자기'가 존재하는데, 종종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서 무의식 속에 묻어둔다. 그러나 묻어두었다고 해서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돌아오며, 우리의 대인관계나 의사결정에 은밀히 악영향을 끼친다.
융의 말을 빌리면,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에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공유해온 원형(아키타입)들이 숨어 있으며, 그 원형의 이미지가 꿈이나 환상, 혹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건넨다. 예컨대 '달이 연못에 비치듯' 하늘의 상징이 땅에 내려와 내면을 비추는 순간이 온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감지하지 못해도, 어떤 초월적 이미지나 상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방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 원형적 이미지를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집단 무의식에만 집중하면서 마스크와 그림자를 벗어던져버리면 윤리의식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데 있다. 계급장과 사회적 규범이 너무 경직되어 사람을 옭아매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무런 기준 없이 그것을 마구 파괴해버리면 혼돈에 빠질 위험이 생긴다. 우리가 꿈과 환상, 혹은 종교의 상징들을 제대로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기존의 규범이나 이미지를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더 큰 방향성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이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통해 새롭고 통합된 중심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다.
개성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마, 아니무스 등이라 불리우는 ‘내적 매개자’들이다. 남성은 무의식에 여성적 면모(아니마)를 품고 있고, 여성은 남성적 면모(아니무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우리가 보통 한 가지 마스크로만 살아가다 보면, 이런 반대 속성은 억압된 채 그림자로 남는다. 하지만 그 반대 속성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깊은 문을 열고, 신적인 이미지와 연결해주는 가교가 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의식은 자신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더 큰 세계와의 연계를 시도하게 된다. 이때 ‘나’라는 자아(ego)는 절대적 중심에서 물러나, 집단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는 새로운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다.
이 상태를 융은 '셀프(Self)'라고 부른다. 셀프는 곧 하늘과 땅이 연못 위에서 만나는 현상과도 같다. 의식의 영역(땅)과 무의식의 영역(하늘)이 투영되고 연결되는 접점이 바로 셀프다. 기독교적 언어로는 "imago Dei"—'하느님의 모습'—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불교에서는 불성, 유교에서는 군자 혹은 성인의 경지, 도교에서는 도(道)와의 합일,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라는 표현들이 모두 이 원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종교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핵심은 한 인간이 한계 지어진 자아의 틀을 뛰어넘어 더 큰 차원의 '나'로 깨어나는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이 결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셀프란 점점 더 넓어지는 '통합의 지평'이다. 매 순간 새로운 상처를 마주하고, 새로운 그림자를 의식으로 가져오며, 또 다른 계급장에 얽매이거나 새로운 마스크를 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우리가 '아, 지금 또 마스크를 하나 더 썼구나', '다시 내 그림자가 나를 휘두르려 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자각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금 더 깊은 자기를 통합해갈 기회를 얻는다.
이런 통합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관념이나 개념 또는 이념의 절대화다. 특정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를 절대화하면, 그 관념이 마스크처럼 작동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언젠가 자신이 외면했던 그림자가 강렬하게 올라오면, 그 그림자를 통해 실제로는 새로운 통찰이나 방향을 얻을 수도 있는데, 이미 견고해진 신념의 벽은 이를 차단해버린다. 이렇듯 사실 종교가 본래 지향하던 것은 인간 내면의 깊은 변화와 통합적 구원이었겠으나, 그것이 단순히 권위와 형식이 되어버릴 때 더 이상 우리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못한다.
오늘날,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기 내부로 들어가는 용기'다. 자기 안의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의 원인과 마주하며, 계급장이 부여하는 위상에 너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아예 모든 사회적 틀과 제도를 무분별하게 부정하지도 않아야 한다. 융이 제안한 개성화 과정은 의식과 무의식, 개인과 집단, 하늘과 땅 사이의 원활한 순환을 추구한다. 그 순환이 원활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단지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더 광활한 영적·심리적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통합적 시각을 얻기 위해 꿈을 기록해보든, 경전을 읽든, 예술 작품을 감상하든 그 상징들이 내 내면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지를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리다 식의 논쟁이 아니라, 왜 이 상징이 내게 특별한 감흥을 줄까?를 곰곰이 헤아려보는 태도다. 그렇게 내면을 헤아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바람(스피릿)이 내 안에 불어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가랑비처럼 작은 흔들림일 수도 있지만, 점차 그 바람이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 자아가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고, 더 큰 질서가 나를 휘감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집단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이며, 우리의 셀프가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다. 그 지점에서 마스크나 그림자, 그리고 아니마·아니무스 같은 여러 층위의 자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의 '통합된 인격'으로 재탄생한다.
물론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플 수밖에 없고, 내 잘못을 직시하거나 오랜 버릇을 내려놓는 과정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어떤 이는 무의식의 심연을 마주하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다시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과정 자체가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된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보내오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한 걸음씩 더 깊은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 어쩌면 선과 악, 남성과 여성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요소가 아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과 달이 연못에 비치듯, 서로 다른 차원의 현상이지만 우리의 내면에서 만나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결국 우리의 삶은 그 연못 같은 무대이며, 위에는 하늘이, 아래에는 땅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하늘과 땅이 공명하는 모습에 깨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상징에서, 때로는 불성이나 도(道)의 이미지에서, 혹은 개인적인 꿈과 환상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숨겨진 '디바인(divine)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 '디바인 이미지'야말로 우리를 끊임없이 회복과 치유, 그리고 창조로 이끌어준다. 땅의 무게를 떠안되, 하늘의 빛도 잊지 않는 상태—이곳에서 인간은 진정한 통합을 경험한다. 우리의 계급장, 그림자, 내면의 디바인 이미지는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그 흐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탐색할 때, 우리는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경지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의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누구이며, 왜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동시에, 거대한 사회적 변화와 기술 발전 속에서 내 존재 가치가 흔들릴 때가 더욱 많아졌다. 계급장만을 믿고 안주하거나, 반대로 모든 사회적 질서를 무시해버리기보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더 큰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 그 여정은 결코 편안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살아 있음'과 '진정한 자기다움'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궁극의 치유이자 통합의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