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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길수록 더 커지는 불안(feat. 바디매오)

예수의 말씀 속에서 찾은 ‘진정한 믿음’의 비밀

by 김희우

며칠 전, 친구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사업 실패를 숨기려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매번 성공한 척 꾸며내야 했다. 처음에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도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밤낮없이 걱정과 불안에 시달렸고, 결국 주변 사람들과 진솔하게 대화하기를 두려워하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스스로에게조차 진실을 숨기고 지낼 때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찝찝해지는 이유를 실감케 하는 사례였다.



성경 속 바디매오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더없이 상징적이다. 예수는 “내가 너를 구원했다”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바디매오가 희미한 소리 하나에 온 마음을 걸고 달려간 것은 예수를 향한 절대적 신뢰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의 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를 ‘자기신뢰’라 부를지 모르지만, 이는 초월자를 믿는 믿음이 자기 내면의 본질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고 볼 수 있다. 결국 외부적인 구원이 아닌, 내면에서 이미 싹튼 믿음이 궁극적으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뇌과학적으로도 ‘진실된 체험’은 뇌신경회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핵심 요소로 알려져 있다.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도 그 거짓에 갇히면, 뇌는 ‘부조화’를 감지해 긴장을 유발한다. 불안이 쌓일수록 전전두엽이 과도하게 피로해지고, 결국 자기 통제력과 집중력마저 약해진다. 또한 한 진화생물학 연구에서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스트레스와 불안 같은 정서적·생리적 지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부분적으로 입증했다.

Robert Trivers.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 October 25).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포장’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경쟁이 치열하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작은 거짓말쯤은 애교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축적된 거짓이 쌓이다 보면, 우리가 잃는 것은 단지 타인의 신뢰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 즉 영혼과 육체가 한마음이 되는 길잡이를 놓치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지켜보는 관찰자다. 남들이 몰라도 나는 안다. 그래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수록 마음 한구석에 무겁고 찝찝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말을 지키고 성실히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에게서는 특유의 안정감과 신뢰가 묻어난다. 겉보기에는 부족해 보일 수 있어도, 결국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계의 온기를 만들어 낸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행복’을 갈망하는 시대일수록 사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근본을 지키려는 노력이 더 절실해진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외침이 세찬 파도처럼 울려온다. 그 믿음은 곧 내면에 심은 씨앗과 같다. 정직, 진정성, 신뢰 같은 선한 씨앗을 매일매일 심전에 새기고 가꾸면, 삶은 뿌리부터 단단해진다. 예전처럼 화려한 ‘포장’이 없더라도, 그 단단함이야말로 진정한 풍요와 자유를 약속해 준다.



거짓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시간을 들이느니, 진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조금씩 성장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 마음의 거짓을 걷어내고 믿음과 신뢰를 싹틔울 때, 그 울림은 자연스럽게 주변에도 전해진다. 혹여 누군가 거짓으로 나를 속였다 해도 굳이 복수할 필요는 없다. 인과의 법칙은 스스로 무너질 자를 무너뜨리고, 진실한 자에게 꽃길을 열어주기 마련이다.



오늘도 수많은 정보와 소음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가운데서 “나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고 자문해 보자. 그리고 ‘자기신뢰’를 위해, 자신을 가장 가깝고 선명하게 바라보는 순간을 가져보자.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명상을 추천한다. 우리가 진정 자신을 신뢰할 때, 비로소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으며, 그 신뢰의 힘이 우리의 삶을 구원한다. 보이지 않아도 가장 중요한 씨앗은 우리 안에서 싹트고, 결국 그 열매는 스스로와 이웃을 풍요롭게 만 것이다.


сус оздоровляє сліпого з Єрихону. Есташ Лесюер (1635—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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