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한 와이프와의 첫 데이트
구월도 가고 시월의 중순, 비구름 몰려오는가 하더니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람 따라 은행나무 노란 잎새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져 날아 내리곤 했는데 해가 떨어지면서 한층 바람은 드세어졌다. 내가 감청색 양복 옷깃을 당겨 잡으며 들어선 곳은 여의도 스페인 하우스. '여기 맞지!'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약속 시간은 아직 삼십여 분 전 '여유 있네' 잠시 안도하며 가볍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순간 캄캄한 동굴 속 어둠인 듯 잠시 시야를 잃는다. 이럴 때면 더욱 민감해지는 청각, 귓속을 뚫고 들어오는 외침 "어서 오세요!".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여기저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빈 좌석들. 구석 쪽으로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들고 뒤따라 온 젊은이에게 고개 들어 눈을 마주친다. "이 꽃다발, 제가 신호드리면 제 앞에 앉을 여자분에게 전해주세요"라고 말하며, 꽃집에서 샀던 생화 한 다발을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여자가 혹시 늦더라도 '오신다고 힘드셨지요라고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펼쳐 들었다. 사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기에 '더 공부해야겠다'라는 의지가 넘쳤으니, 항상 책을 그것도 전공서적을 옆에 끼고 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곁으로 다가서는 인기척, 여자 목소리 "혹시 ○○○씨인가요?" 고개 들어 물끄러미 쳐다본다. 베이지색코트, 잔잔한 미소 짓는 듯 말 듯 하얀 얼굴, 내가 기다리던 그녀였다. 그렇게 우리 만남은 시작되었다. 누군들 앞날을 어찌 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리!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나의 신호에 따라 마치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기라도 했던 듯, 젊은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두 손 모아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 나에게 무슨 하소연이라도 할듯한 눈빛으로 슬쩍 보더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분명 작은 감사와 감동의 말투였으니 그렇게 우리 인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그녀의 속마음, "차분히 앉아서 책 읽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꽃다발 너무 좋았다."라고
여의도 다리 건너오면서 바라봤던 늦가을의 짧은 해, 윤슬 반짝이던, 창가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와도 같았던 희미해져 가던 길거리. 다시 나서니 어느새 사방은 캄캄, 칠흑 같은 밤하늘의 별만 쳐다볼 뿐, 도로 쇼윈도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불빛들이 앞길을 비춰준다.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경비동 앞, 나뭇가지를 흔들고 길을 쓸어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목마름과도 같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알 수 없는 긴 이별을 한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아픔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흘러드는 외로움에만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의 소위 맞선을 보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이곳에서 저곳에서 사는 모습 상상하며, 맞벌이 외벌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별생각도 다해보는 게 젊음의 특권, 아니 청춘의 무게 아니던가! 무슨 큰 고민인 듯, 이것만 정하면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소망이었으니, 이런 희망에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스럽기도 했었으니, 지금의 그리움 상상이나 했겠는가? 행복한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게, 와이프의 사별이 있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니, 이 어찌 아이러니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사별한 와이프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