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

첫 선물

by fantasticbaby

"한국 갈 때 선물 뭐가 좋을까?" 혼자 되뇐다. 강가 벤치에 앉아 눈을 돌려 고딕 풍 첨탑들로 이어지는 건물들을 쫓아간다. 초록색 녹지를 옆으로 도시 저편으로 넘어가는 은빛 물결. 지난 주말에도 이곳에 와서 한참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하늘은 흐리고 회색빛이지만 강물은 그렇지 않다. 맑게 빛나고 있다. 지난주 왔을 때도 그 생각을 했지만 런던에서 본 흙탕빛 묻어날 것만 같은 희미한 템즈강, 케임브리지의 캠강과 같은 물줄긴지 의심스럽다. 잿빛 도시 속에서 만나는 빨간색 전화부스는 미소 띤 그녀를 보는 듯 정겹다. 그때그때 끌어 모은 동전을 집어넣으며 '행여나 동전이 모자랄까' 노심초사하며 통화를 한 순간이 마냥 먼 과거와 같이 아득하다. 다소곳이 "녜~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벼르고 벼른 통화를 마쳤다. 그녀 목소리 톤에서 뭔가 걱정스러운 초조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게 뭘까,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렇지 뭐 내가 잘 난 게 있나!' 불과 1년 전 십여 곳 미국 대학교에서 온 입학허가서를 내팽개치고, 직장생활로 뛰어든 나. '하필 이번 출장지가 영국 그것도 캠브리지 대학이라니.' 거칠게 투쟁하듯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건만, 졸업 후 삶의 긴장은 팽팽하다. 갈매기조차 볼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거친 파도를 모조리 껴안고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강변 가로수의 신록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시야 속에 들어오는 강물과 야트막한 수림과 하늘을 바라보며, 끼리끼리 웃고 떠드는 청춘들의 목소리가 다가오다 멀어져 간다. '한국 갈 때 뭘 선물로 사갈까' 머릿속은 온통 그 물음이다.


길게 늘어진 햇살이 내려앉은 사무실. 책상 위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열쇠고리를 찾아 손에 꼭 집어든다. 영국 귀족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중앙에 방패 모양, 금빛과 붉은색 파란색 테두리, 십자가와 사자 독수리 그리고 용 상징물이 그려져 있다. "영국 귀족 분위기 나네" 툭 내뱉으며 손으로 집어 들고 양복 정장 안주머니에 넣었다. 퇴근 시간 막 지난 엘리베이터 앞은 한산했다. 지하층에서 내려 익숙한 발걸음으로 곧장 중세 유럽 기사상이 지키고 서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선다. 한켠 벽위로 흑백 영화 속 한 장면과 현실적이지 않은 얼굴 표정의 영화배우 사진이 걸려있다. 영국 시골 풍경 그림도 한 폭 걸려 있고, 가구들도 품위 있어 보인다. '이곳 주인이 영화 배우지?' 흑갈색 원목 테이블을 돌아, 붉은빛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얼마만인가' 지난 몇 주간 영국 캠브리지 출장을 다녀온 후 첫 만남이다. 이곳은 신용산역 국제빌딩 지하, 영국풍 레스토랑 런던팝이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올 시간이네'라고 생각하던 차 출입구로 들어서는 그녀. 베이지색 코트 가벼운 발걸음, 반갑게 손을 들고 나의 위치를 알리며 자리로 앉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영국 잘 다녀오셨나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 "이것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며, 그녀 앞에 중세시대 가문 상징을 달은 가죽 열쇠고리를 건넸다. "아~"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수프와 스테이크, 영국에서 한 달간 지내며 익숙해진 으깬 감자에 치즈 우유가 들어간 매쉬드 포테이토, 부드럽고 향긋하다. 청춘 남녀의 만남이 그렇듯, 산들바람 속 따뜻한 햇살 아래 빛나는 벚꽃비 맞는 봄날 같다. 아니 알록달록한 붉은빛 낙엽 떨어진 가로수길을 걷는 시간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평생 몇 번 되지 않을 눈부신 시간을 보냈다. 밑바닥을 보이는 커피잔을 내려보며 "이제 갈까요"라는 말에, 뭔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는 그녀. 뭔가 결심이 선 듯 입을 연다. "제 언니 이혼했어요." 잠시 당황스럽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을 그녀. 지난번 영국 출장 가기 전 만났을 때 "우리 집안 가까운 친척까지 이혼한 사람 없다"라고 자랑삼아 얘기했었던 게, 그녀에게는 아팠던듯하다. 지난 몇 주간 '어떻게 말할까 말까', '어떤 식으로 얘기하지?' 나름대로 고민을 했었던듯하다. 그리고 지금 언니의 이혼 사실을 끄집어낼 때까지 힘들었으리라 '아 안 됐네요' 이런저런 궁금한 얘기를 나누었다. "언니 이혼에 대해서는 오늘만 물어보고, 다시는 얘기 안 할게요, 본인 상처가 가장 클 테니 위로드립니다." '알리기 싫은 비밀스러운 사실을 나에게 알리기까지 그녀 마음 어땠을지!'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붉은 노을 한쪽 작은 무지개가 뜬 하늘을 본 기분이다. 깨어 있으려고 버티다 결국 잠들고, 크리스마스날 아침 눈뜨자마자 산타 할아버지 선물을 발견하고 기쁨에 젖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다. 그녀와의 인연이 평범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니 우리의 사랑이 시작한 순간이다. 그러고 나서 와이프 사별 후 지금까지, 언니의 이혼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