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경을 벗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가 했더니 여기저기 창을 뚫고 나오는 불빛들. 늦가을 찬기가 스멀스멀 나를 감싼 채 몸속으로 들어온다. "춥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아파트 경비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몇 동 사시나요?" 낯선 젊은이가 어슬렁대는 모습이 신경 거슬렸는지 묻는다. "사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휴일, 시내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운동을 했다기보다는 고모집에 빈둥대고 있기보다 나오는 게 편했다. 몇 번인가 만났던 할머니, 배영하는 모습 눈으로 쫓아간다. '빠르네, 건강하시니 오래 사시겠다.' 코를 쏘는 소독제 냄새 가득한 풀장에서 헤엄쳤다. 그리고는 곧장 그녀 집 앞으로 왔다. 불쑥 나타나는 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갑자기 나타난 나를 '문전박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늘 끼고 있던 안경도 벗어버리고, 콘택트렌즈를 했으니 그것도 어색한 마음이다.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 그리고 "○○씨 뭐 하고 계셔요, 연락 주시지" 반가운지 원망인지 알 수 없는 말투, 그녀다. 어두워지도록 몇 시간을 홀로 바깥에서 기다리는 청년이 안쓰러웠는지, 경비원이 그녀 집으로 인터폰을 했다.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가 나왔다. 커피잔을 바라보던 그녀,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듯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나를 잠시 보더니 "콘택트렌즈 끼셨네요" "수영장 갈 때는 안경 벗고 나옵니다" "안경 벗으니 눈도 크고 잘 생겨셨네요" "..." 나는 잘난 얼굴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안경을 끼고 살아야 했으니, 앞에서 보면 도수 높은 안경 탓에 눈은 쪼그라들고, 옆에서 보면 빙글빙글 줄무늬가 보였으니, 남자로서 못 생긴 얼굴이다. 바깥바람맞은 몇 시간의 기다림, 보상이라도 받는 듯 '오늘 잘 왔다.'
떨어진 낙엽, 바람에 쓸려 날아갈 듯 말 듯 허덕인다. 찬바람 속 흩뿌려지는 하얀 구름은 푸른 하늘을 더욱 파랗게 물들인다. "춥지요?" 나는 그녀의 스카프를 톡톡 건드리며, 살짝 어깨를 감싸 안듯 앞으로 걸어간다. 담장 너머 서울 시내 건물들 불쑥불쑥 올라선다. 화려한 단청 울긋불긋한 궁궐 건물,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면서 멋진 사진을 그려본다. "여기 이쪽 서 볼래요" 주말을 맞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서 경복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오늘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린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한 장씩 넘긴다. "이 사진 잘 나왔네요"라고 말하며 그녀 앞에 내밀어 보여준다. 그녀 손이 다가와 카메라를 잡아 든다. 추위 탓인지 눈부신 손바닥이 창백하듯 하얗다. 그 아래 갈색 치맛자락 그리고 하얀 다리가 보인다. 갑자기 나의 손이 그녀의 다리 위로 옮겨간다. 그리고 치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착각이 든다. "이 사진도 좋네요"라는 그녀 말에, 뭘 훔쳐보다가 들킨 아이처럼 잠시 얼굴을 붉힌다. "그래요 저 건물 앞에서 한 장 더 찍어요"
경복궁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조선 왕조의 영화는 나의 젊음을 닮았다. 언젠가 안개처럼 사라질 청춘이다. 몇 시간의 야외 데이트 끝에 얼굴도 얼어붙었다. 희끗희끗 뒤돌아 보며 '혹시 빈 택시가 올려나' 기대 섞인 눈으로 간절하게 바라본다. 추운 초 겨울, 가난한 청춘 남녀, 자가용은 기대할 수 없다. 찬바람에 떠는 그녀를 바라보니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나 혼자 걷는 건 괜찮지만, 결혼하면 차 있어야겠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고, 그녀를 앞서 태운다. 차비를 내고 그녀가 앉아있는 좌석으로 걸어간다. 차가 이미 출발해서인지 나도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린다. 그녀가 앉아있는 좌석 앞에서 눈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씨 어디 다녀오시나요? 얼마만인가요?" 불쑥 던진 나의 농담 그리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를 만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았던 적은 없었다. 지금은 허리를 마주 부딪힐 정도의 좁은 좌석에 둘이 함께 앉아있다. 그녀의 흔들림이 내 어깨를 통해 전달된다. '차 없어 버스 타니 좋네' 따뜻한 버스 속 안경을 벗으니 김 서리던 불편함은 없어졌다.
나중에 말했다. 경복궁 벤치 같이 앉아 있을 때, "언젠가 치마밑으로 내 손이 들어갈 거라 생각했다"라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그녀 "이그~ 엉큼한 남자" 그녀 말은 계속된다. "버스 속에서 농담할 때 아 이 남자하고 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 "안경 벗은 얼굴 보면서 이 남자 잘 꾸며주면 되겠다고 느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