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빛으로 가는 첫 발걸음

by 정인

어느 날, 멍하게 중고 거래 앱의 페이지를 보던 중, 한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담자 모집]

:연구 자료로 활용 가능

<OOOO대학병원 부속 상담소>


별생각 없이 게시글 하단의 이메일로 이름을 비롯한 몇 가지 정보와 내가 상담하고 싶은 내용을 적어 보냈다. 답장이 금방 왔다. TCI 검사, 문장완성검사 등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상담 예약을 잡았다. 이 상담경험이 내 인생을 바꿀 줄은 꿈에도 몰랐을 때였다.


첫 상담,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옛이야기를 하는 건 무척이나 어색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가족들과의 불화를 외부에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불행이 다른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내 약점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터였다. 그래서인지 상담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느끼는 환기 또는 개운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더 가까웠다. 가족의 비밀을 누설한 배신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가족과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데서 느껴지는 수치심과, 가족의 험담을 괜히 외부에서 했다는 죄책감. 항상 상담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그거 말하지 말걸",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별거 아닌데 그냥 내 기억이 크게 부풀려진 게 아닐까" "내가 말솜씨가 없어서 괜히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더 나쁘게 오해하실 것 같아." 등 온갖 목소리들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하지만 정작 상담을 하는 순간 나는 늘 울고 있었다. 내가 처음 상담소에 간 계기가 남동생과의 관계 때문이다 보니, 남동생과 부모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실의 소파에 앉아 남동생 얘기를 시작하면 어렸을 때 기억이 마술사의 실크모자 속 비둘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과거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나지를 않았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그 기억을 조심스럽게 현재로 끌고 오셨다.


"그래서, 지금은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라든가, "그때 어떤 감정이었나요?"라는 질문들에 나는 투우장의 소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분노와 슬픔 사이에서 이리저리 언어를 찾아 헤맸다.


처음에는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일단 스스로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느끼는 것들은 감정보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감정이 격해지면 숨이 막히고, 한계까지 공기를 불어넣은 풍선처럼 온몸이 터져서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극단적인 신체적인 감각들에 압도되다 보니 그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담소에 가면 태풍의 가장자리에 있다가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다.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 기억이 휘몰아치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셨다. 그게 참 많이 위안이 되었다. 내가 어떤 감정 표현을 해도 거부하시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흐느껴도 선생님은 항상 차분하게 어떤 기분인지를 물어보셨다.


어떤 기분이냐고. 내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나조차도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는 질문에 당황하다가 답을 내기 위해 골똘히 생각했다. 슬픔. 기쁨. 분노. 감정은 그런 단순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 살짜리 어린애처럼 더듬거리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억울했던 것 같아요. 내 잘못이 아니어도, 모든 게 내 탓이었거든요. 하다못해 동생들이 토마토를 안 먹는 것도 첫째를 닮아서였고, 책을 안 읽는 것도 나 때문이었어요. 정작 저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읽던 책을 뺏기는 지경이었는데도요."


놀랍게도, 감정을 표현하는 건 금방 익숙해졌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시작하니까 말이 트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감정들과 연관된 다른 기억을 거미줄처럼 얽어,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는지의 과정을 탐구할 수 있게 됐다.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내 감정을 스스로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감정이란 게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는 것부터 관찰이 시작되었다. 그 감정을 스스로 언어로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를 배운 느낌이었다. 신기했다. 나는 언어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그 외국어를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곱씹으며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와,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온종일 곰곰이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남동생과의 관계 개선이란 이유로 시작했던 상담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샌가 "나"로 주제가 바뀌어있었다. 대신 나의 근황에 관해 말씀드렸다. 요즘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생각이 드는지 등등. 물론 상담 몇 회기 만으로 나의 정신건강이 비약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힘들었다. 다만 단순히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왜 이 감정이 드는지골똘히 고민하는 과정은 그 고통에 덜 몰입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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