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뒤바뀐 입장

by 정인

상담을 시작하던 시기, 남동생과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내가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모님은 그 배로 빨리 늙고 계셨다. 쉰 다섯 무렵부터 두 분은 어디가 아프다, 은퇴하고 싶다, 매일매일 자식들에게 하소연을 하셨다. 50대의 부모님은 이제는 화내실 기운이 없어 조금은 유해지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이 약해지신 걸 볼 때마다 내 안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십대 중반 이후로 어머니와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주말이면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고, 강아지 산책을 했다. 퇴근하고 그 날 있었던 일을 나누며 웃었고, 저녁마다 개수대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도 했다. 그런 일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고 심지어는 즐거워서, 그래서 어머니와의 나쁜 기억을 다 털어낸 줄 알았다.


플래시백은 아주 뜬금없는 순간에 찾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어머니가 자꾸 뒤쳐졌다. 한숨을 쉬시며 빨리 걷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그 순간, 이유 모를 분노가 마음을 서늘하게 스쳐지나갔다. 분노의 대상은 이십년 전의 어머니였다. 초등학생인 내가 걸음이 느리다고 신경질 내며, 거리에 나를 놔두고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어머니가 먼 기억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다리가 아프니 서서 가면 안 되는 내게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올라가며 “너는 속 편해서 좋겠다. 시간 아깝지도 않니?”라고 쏘아붙이던 어머니. 항상 내게 굼뜨다고, 동작이 어쩜 그렇게 느리냐고 면박을 주던 어머니. 젊은 어머니가 화냈던 수많은 날들과 혼나면서도 짧은 다리로 어머니를 열심히 따라가려 애쓰던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다리가 아프다, 빨리 걷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마다 머릿속에는 "그렇게 약했던, 어렸던 나에게 어머니는 왜 그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어머니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의 매정했던 어머니와 관계 개선 후의 어머니의 모습이 통합되지 않았다. 나는 이 감정을 어디에, 어떻게 표출할지를 몰라 혼란스러웠다. 상담 때 내가 이런 고민을 말하니, 상담사 선생님은 무척이나 의아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당연한 거예요. 과거에 정인씨에게 그랬던 어머니도, 지금의 온화한 어머니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별다른 해결책은 제시해 주시지 않았다. 이후에 어머니와 함께 걸을 때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엄마 걸음이 느린 걸 볼 때마다 화가 나요. 내가 어리고 작을 때는 내 느린 걸음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짜증만 내더니, 이제 엄마가 되려 느리잖아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화가 날 때마다 차분하게 내 감정을 말했다. 어느 날은 어머니는 내 말을 수용해 주었고, 어느 날은 내가 별나다고 말했고, 어느 날은 그저 자신의 늙음을 한탄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점차 괜찮아졌다. 분노와 혼란을 그저 삼키지 않고, 감정과 기억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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