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내게 상담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ZOOM으로 원격 상담하는 것을 보더니 “그 미친년이나 끌어안고 살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걸어갈 힘을 상담을 통해 키울 수 있었다. 가족들과 거리를 두고 차분히 생각하는 방식을 익혔고, 내가 생각보다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이 안전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이 높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 선생님의 예리한 질문에 미처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도 기억하게 되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옛날 일들을 떠올렸을 때의 나는 늘 무력하게 맞고 있었다. 줄줄 눈물을 흘리는 내게 선생님은 질문을 던지셨고, 그 질문에 많은 것이 바뀌었던 것 같다.
-그때 맞으면서 어렸을 때의 정인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거 같은 충격이 왔다. 그러게, 그 어린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망도 못 가는 채로, 식탁 아래의 손바닥만 내려다봤었던 것 같은데.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감정이 떠오른 것은 몇 초 뒤였다.
-아무리 때려도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을 거야. 스스로한테 거짓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었어요.
그 문장을 내 입으로 뱉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어둠 속에서 반짝 꼬마전구가 켜진 것 같았다. 어두웠던 과거가 조금은 환해졌다. 물리적으로 부모님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어도 마음속으로는 힘껏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던 거다.
늘 통제를 당하고, 그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자아를 가지고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거다.
-정인 씨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이였군요.
선생님의 말씀에 울고 있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래. 난 맞기는 싫어서 겉으로는 얌전하게 굴었지만 조종하기 쉽지는 않은 아이였다. 통제와 감시가 만연했던 20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무력한 적 없었다. 어린 내 몸은 무력했을지언정, 그 안의 정신은 늘 살아서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제 그걸 안다.
그 당시 상담사님에게는 지금도 아주, 아주 고맙다. 항상 살아간다는 게 너무 무서웠는데, 덕분에 사는 게 무섭지 않아졌다. 내가 내 생각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선생님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내게 필요한 치료와 도움을 받는 게 두렵지 않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자살 충동과 우울과는 별개로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산다는 게 무섭고, 삶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사실이 무섭고,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는 그런 당연한 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걸 끊임없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뎌야 했던 28년 동안보다 두 배쯤 견뎌야 하는 게 공포스러웠다. 항상 삶은 나에게는 짧은 즐거움과 오랜 견딤의 반복이었고, 나는 견디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 약해빠진 몸뚱이와 정신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니. 오랫동안 “너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야.”라는 평을 받아왔고, 실제로 몸의 이곳저곳에 원인 모를 통증을 겪었다. 일 년 내내 우울한 사람이었고, 잊을만 하면 한 번 씩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래서 내가 삶을 살기에 썩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혼자 내렸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꽤 강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나는 약하지 않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름 잘 맺고 있으며, 힘들 때 누군가한테 도움을 요청할 용기도 있다. 든든한 교수님도 계시고, 나에게 맞는 약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나 스스로의 불안을 알 수 있다. 상담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정인 씨 내부의 자원들을 찾아보자는 것들은 이런 건가보다. 내 작은 장점들과 내 삶에서 나름 좋았던 것들, 내가 성공했던 경험들. 도저히 혼자서는 그것들을 찾을 수 없었지만,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내가 그런 기억을 모으는 데 동참해 주셨다.
이제는 삶을 견디기보다는 흘려보내고 있다. 50세의 내가 썩 기대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거란 걸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상담을 받으면서 제가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던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강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면서 사는 게 전처럼 무섭지 않아 졌다. 제대로 된 상담은 내 세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삶이 살 만하다는 것,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내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보다도 거대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는 상담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상담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상담을 받아도 내가 겪은 일들과 처해있는 환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상담은 내가 경험을 인식하는 방식을 변화하도록 도왔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개방하는 경험을 했고, 과거 사건에 대해 인식을 재구성을 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들을 억압하지 않고 인정하려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유지 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부터 모든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알게 된 것을 조금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