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점차 옅어지고 있습니다. 해가 뜨며 밤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사물의 경계가 명확해지듯, 우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감정들의 형태가 좀 더 선명해집니다.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감정의 지느러미가 수면 위에서 기쁘게 일렁이는 것을 보며, 올해의 우울이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 같아 무척 기꺼웠습니다.
나는 일 년의 절반은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나머지 절반은 우울 속에서 헤맵니다. 여름과 가을 동안은 매미유충처럼 땅 속에 묻혀있다가 겨울 초입쯤 되면 땅 위로 올라와서 봄까지 살아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3년 전부터 반복되었습니다. 365일 시종일관 우울했던 시절을 생각하노라면 일 년의 절반이나 괜찮을 수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지만, 11월의 초입부터는 6월에 시작한 올해의 우울이 끝날 시점을 계속 기다렸습니다. 이쯤이면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나 조급해하며 우울의 늪에 잠자코 잠겨있었습니다.
가라앉고 있다는 감각은 항상 슬픕니다.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무력감. 내 어딘가 갉아먹히고 있다는 허탈. 자기 연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코와 입으로 들이치는 우울을 거부하면서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는 회의감.
그럼에도 반복되는 우울증으로 깨달은 것은 그래도 죽지는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지만 이번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니 기다리면 언젠가는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려 노력합니다. 발버둥을 치든 시체처럼 가만히 있든 살아있기만 하면, 어느 순간 감았던 눈을 뜨면 조용히 수면 위에 떠있을 것이라, 그리하여 두 눈 가득 하늘을 담고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항상 '밤'보다 '새벽'이 괴로운 법이라고 배웠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보다도, 정작 해가 뜨기 직전에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라고, 국어선생님이 시를 분석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밤이 가장 무섭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밤. 해가 뜰지 알 수 없는.
이십 대의 나는 달빛도 없는 꼭두새벽에 걷다가 몇 번이고 넘어져 깨진 무릎을 붙잡고 종일 울었습니다. 이 세계는 해가 뜨지 않는, 밤이 계속되는 세계이고 이제 다리가 너무 아파 그만 걷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른인 지금은 그때만큼 밤이 어둡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감사하고 있습니다. 밤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나의 밤을 반딧불이처럼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을 먹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주변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다 보면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는 게 괴롭고 지겨울지언정 덜 고통스럽습니다.
이번 여름 내, 어머니는 서른 된 딸을 다마고치처럼 키우셨습니다. 주말마다 침대에서 숨 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산책을 시키고 자야 할 때를 알려주셨습니다. 친구들은 파리한 얼굴으로 약속에 나간 나를 집에 일찍 들여보냈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내게, 힘든 거 이해한다고, 푹 쉬라고 하고는 다음 약속을 잡으며 내가 괜찮아지기를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었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항상 많습니다. 도움을 분에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살아있어요. 감사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그냥 지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많은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