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깊어지고 있다. 항상 평일 6시에 예약 발행하던 글을 어제 처음 발행하지 못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올려야지 생각하며 책상앞에 앉았다. 원래 하던 옛 이야기 대신, 오늘은 현재 내 상태를 기록해본다.
NRS라는 통증척도가 있다. 통증이 전혀 없는 것을 0점, 가장 심한 통증을 10점으로 가정하여 통증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통증은 가시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라는 특성이 있어 보통 병원에서 통증 평가를 하기 위해 이러한 척도를 사용한다.
통증과 우울은 많은 부분에서 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떠한 검사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아픈 부위가 다를 뿐 거의 유사하다. 나는 몇 년전부터 스스로의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NRS와 유사한 간이척도를 만들었다. NRS와 다른 점이라면, NRS는 숫자가 높을 수록 심한 통증이지만 내 척도는 숫자가 낮을 수록 심리적 고통이 크다는 점 정도다. 0점이 가장 심한 우울, 10점이 가장 안정된 상태라 가정을 하고 점수를 산정한다. (하지만 7점을 넘어가본적이 손에 꼽는 것 같다.)
평소의 나는 5-6점, 조금 우울한 나는 3-4점이었지만 어제의 나는 1-2점이었다. 당장 신체적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목소리까지 또렷하게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공기 70에 소리 30의 비율이랄까. 사무실 전화를 받는 내 가느다란 목소리가 낯설었다.
결국 심해의 바닥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을 참지 못하고 어제 밤에 트라조돈 반 알을 먹었다. 원래는 수면보조용으로 처방받은 약이지만, 실제로는 불면증 호전으로 거의 복용한 적이 없다. 이전에 첫 이틀간 트라조돈을 복용할 때는 부작용으로 중등도의 두통과 감정의 둔화를 겪었다. 아마 의학용어로는 정동둔마라고 부르는 상태일 것이다. 설명하자면, 감정이 죽어서 박제가 된 동물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불안하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아무 걱정도, 생각도 들지않고 머리가 텅 빈다. 그동안 내게 감정이란 꽤나 거추장스러운, 퇴화되지 않은 꼬리 같은 것이어서 꼬리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더는 말썽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약물 부작용이라해도 썩 나쁘지 않았다. 척도로 말해보자면 대충 3점 정도에 감정을 압정으로 고정해둔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10점 만점에 3점은 거들떠도 보지않았겠지만, 지금의 내게 3점이면 더 바랄게 없다. 1점의 감정상태쯤 되면, 우울이 그냥 현상이라기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것, 또는 시간의 밀도를 한없이 떨어뜨려 내 인생을 낭비시키는 무언가, 그런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이제 잠드는게 어렵지 않음에도 어젯밤 트라조돈 반 알을 물과 함께 입에 털어넣었다. 약이 잘 들었는지 오늘은 하루종일 마음이 평화롭다. 아침에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지만,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먹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총탄이 날아드는 전쟁터에 있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옮겨진 기분이다. 지금 비행기가 내가 있는 자리에 추락한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겁에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평온함이다. 당장 해야할 업무 외에는 머릿속이 조용하다. 표정이 잘 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사소한 문제긴 하지만 표정을 지을만큼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도 있다.
아무튼 얼른, 어떻게든 괜찮아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