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상담기록] 3회기

by 정인

벌써 세 번째 상담이다. 퇴근이 끝나자마자 상담실로 뛰어와서 선생님이 간식으로 꺼내주신 스트링치즈를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어머니의 행동전략을 발견한 것 같아요. 자녀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긴 하지만, 계속 반복해서 관찰되는 행동패턴이요.



선생님은 웃으시며 무엇을 발견했냐고 물으셨다.



-어머니는 제게는 항상 서운하다고 하세요. 말끝마다, 서운하다고 감정적으로 수용받기를 원하세요. 저는 그게 지겨워요. 만날 큰 딸한테만 서운하다고 말하는 엄마를 받아주기가 벅차요. 그런데 여동생에게는 서운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더라고요. 그 애한테는 ”네가 그렇게 똑똑해? 그렇게 잘났어? “라고 공격하듯 말하세요. 물론 여동생은 본인 하고 싶은 말은 웬만하면 다 말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 애한테 하는 거에 비하면 저한테는 공격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으시거든요.


-어머니도 30년 동안 자녀를 키우면서 어머니도 나름의 자식 사용설명서가 생기셨을 거예요. 큰 딸한테는 공격적인 말투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게 잘 먹히고, 둘째한테는 감정적으로 구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아시는 거죠. 셋째에게는 어떤 전략을 쓰시나요?


-글쎄요. 셋째한테는 말을 안 하시죠. 그 아이는 그냥… 말이 안 통하거든요. 이런 것들을 어머니가 스스로 알고 쓰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복되는 것 같아요.



천장을 잠시 응시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일주일 사이에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주제를 꺼냈다.



-어머니가 12월 중순에 눈 수술을 하신댔어요. 한쪽 눈 수술이고,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 병원이어서 왔다 갔다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한참 고민했어요. 내가 연차를 내고 따라가야 하는가? 꼭 갈 필요가 없다는다는 건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뭔가 안 가면 계속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결국 연차를 냈어요. 그날 연차를 냈다는 게 꼭 병원에 따라가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따로 할 일도 없고요. 그냥 쉴 수도 있겠죠. 아침에 어머니한테 병원 같이 가줄까 물어보고 그날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 보려고요.


-마음속에 두 가지 목소리가 있군요. 어머니를 뭐 하러 따라가야 하냐고 짜증을 내는 친구와 그래도 아예 안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친구요. 오늘은 그 두 친구랑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선생님은 내가 앉은 소파 옆에 있는 쿠션 2개를 손으로 가리키셨다.



-쿠션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봅시다.



상담은 언어적인 치유과정만이 아닐 수 있다. 그보다 공감각적인 상호작용에 가깝다는 것을 이 상담소에 와서 처음 깨달았다. 선생님은 내 마음의 어느 곳을 들여다볼지 말을 건네며 등불을 비춰주시지만, 선생님의 언어 외에도 완전히 나만을 위해 마련된 안전한 공간에서 뭔가를 만지고, 느끼고, 꺼내는 행동도 치유에 무척 크게 작용하는 듯했다.


멀리 있는 베이지색 쿠션을 어머니를 냉담한 친구, 내 옆의 녹색쿠션을 어머니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는 친구로 이름을 붙였다. 선생님은 멀리 있는 쿠션을 내게 안겨주셨다.



-자, 이 친구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냉담한 친구는 어떻게 느끼고 있죠?


-어머니에게 혼자 기대하고, 좌절하는 게 반복되니 지쳐요.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만큼 어머니가 저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계속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에요. 다른 인간관계는 내가 서운하면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니는 그게 아니니까… 그래서 더는 뭔가를 알아서 하고 싶지가 않아요. 일단 어머니는 좀처럼 말로 요구하지 않으세요. 넌지시, 던지시면 제가 보통 알아서 이것저것 챙기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같이 가달라고 하시면 가드리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여동생은 원래 엄마가 그런 말 못 하지 않느냐 했지만, 그건 제가 말하기도 전에 미리 해드리기 때문이에요. 물론 보통은 엄마가 수술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같이 가드릴까 여쭤봤겠지만… 이제는 왜 굳이 제가 관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일에 휘말리면… 피곤해요. 제가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옆에 있는 것 만으로 감정을 받아내야 해요. 문제는, 제가 감정을 받아내는 방식이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을 때예요. 확률은 절반 정도예요. 50%는 엄마가 제게서 위로를 받거나 제가 도움이 되는 경우죠. 보람차고 기뻐요. 그런데 나머지 50%에서 어머니 마음에 뭔가 차지 않으면 서운하다, 쌀쌀맞다, 냉담하다는 말이 돌아와요… 우스운 게 세 형제 중에 저한테만 그런 말을 하시는데,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죄책감이 들어요. 어머니랑 애초에 같이 있지 않으면 될걸, 기껏 시간을 내고 노력해서 괜히 같이 있으면 죄책감을 느낀다고요. 죄책감이라는 그물에 걸린 느낌이에요. 어머니의 전략에 더는 말리고 싶지 않아요. 엮이고 싶지 않아요. 냉담한 거 저는 좋아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느끼거든요. 엄마 속이야 터지겠지만, 제 마음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어머니의 전략에 넘어가고 나면 "앗, 또 속았다." "낚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후회하게 되니까요.


-맞아요!! 또 속았다, 그게 딱 제 마음이에요. 알면서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게 참 힘들어서 심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어머니의 서운하다, 쌀쌀맞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음... 제 마음이 무시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제가 무가치한 것처럼 느껴져요…


-거리를 유지하는 친구는 무가치한 느낌에서 방어해 주는 친구군요? 본인이 일을 잘하고 있는 걸 알고 있나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얘는 알아요. 왠지 모르겠는데 아이는 아니고 많이 큰 친구라서요.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항상 고생이 많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고 싶네요



냉담한 방어기제는 나름 어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 친구는 냉소적으로, 무표정하게 팔짱을 끼고 경계심 어린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말이 통한다는 점이 무척 편했다.



-오, 맞아요. 그 친구의 행동이 정인 씨를 지키는데 효과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어요.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모든 방어기제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선생님이 이 친구를 정상적이라고 해주시는 것 같아서 살짝 당황했다.



-정말요? 이게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효과적인 방법이신가요?


-그럼요. 제가 직접 내담자들에게도 권하기도 하는걸요. 계속 애착대상에게 휘둘리고, 일이 끝나면 왜 휘둘렸지 후회하고, 자책하는 과정을 반복하시는 분들에게는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답니다.



오, 그렇군. 어머니에게 냉담하게 굴면서, 내 속이라고 다 편한 건 아니다. 무관심하려 하지만 신경이 아예 안 쓰일 순 없으니까. 또, "자식이 부모한테 그러면 안 되지."같은 훈계도 마음속 어디선가 들려오기도 하고. 하지만 선생님이 열심히 일하는 방어기제를 긍정해 주셔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 말을 들으니까 이 친구가 더 뿌듯해하네요.



무표정한 얼굴 위로 의기양양한 기색이 어렸다. 거리 두기를 잘하는 친구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문제는 선생님이 다른 쿠션을 안겨주시고 난 후였다.



-이제 엄마를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도 들어봅시다! 아까 첫 번째 친구에게 누구 편을 들려는 게 아니고, 널 치워버리는 게 아니고 그냥 둘의 이야기를 공평하게 들으려 한다고 말해주세요. 이 친구는 뭐라고 하나요?



어... 난관에 부딪혔다. 세상에, 엄마를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내 마음속 무언가를 꺼내야 하는데, 쉽게 되지 않았다. 쿠션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냉담하게 구는 친구가 잘 일하고 있다는 격려를 방금 들어서인지, 엄마 편을 드는 친구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키려 일하는 아까의 친구를 방해하는 훼방꾼 같이 느껴져 꼴 보기가 싫었다.



-듣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 얘 얘기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친구는 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얘는 아니란 말이에요. 얘랑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 초록색 쿠션을 당장 무릎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양손을 주먹을 쥐고 쿠션을 팡팡 내리쳤다. 거부감이 들었다. 나를 관찰하시던 선생님은 침착하게 거기서 세 번째 친구 한 명을 더 등장시키셨다.



-이 아이 이야기를 듣기 싫다고 화내는 친구가 있군요. 왜 듣기 싫어할까요? 들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다시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봐 무서워요. 약해질 것 같아요.


-그럼 지금 화내는 친구에게는,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제가 언제든 개입할 거라고 말을 해주세요. 우린 그냥 이야기만 듣는 거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럼 다시 두 번째 친구를 들여다봅시다. 뭐라고 하나요?



심호흡을 하고 쿠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뭐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상을 썼다. 모호한, 비정형의 형태다.



- 얘, 입이 없어서 말하지 못해요.



선생님은 당황하시지 않으셨다.



-그렇군요? 그럼 몇 살쯤 돼 보이나요?


-나이 짐작도 가지 않아요. 그냥 덩어리예요.



그 순간 내 손에 들려있는 건 분홍색 풍선껌을 아주 크게 불어놓은 것 같은 덩어리였다. 얼굴도, 입도, 손도, 발도 없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충 만져서 3D프린터로 구현해 놓은 조잡한 덩어리.



-입이 없는 애랑은 대체 어떻게 대화해야 하죠? 얜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정인 씨는 그 친구가 말을 안 해도 느낄 수 있어요. 정인 씨 마음의 부분인걸요. 그 친구는 지금 어떤가요?



어떤 기분이 드는지 감각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윽고 덩어리 내부의 천진한 호기심이 점액질의 표면을 지그시 미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기를 궁금해하는 거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왜 궁금해하는지 궁금한가 봐요.


-대답해 주세요.



난 아직도 소통의 의지가 그다지 없었다. 얘, 난 사실 너 안 궁금해. 그냥 선생님이 물어보래서 물어보는 것뿐이야. 심술궂게 중얼거렸더니 덩어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거 잘 되고 있는 거 맞나. 막막하다. 난 선생님께 상황을 전달하며 한숨을 쉬었다.



-생물처럼 반응을 하긴 하네요. 생물은 자극에 반응하니까요. 세포 덩어리 같네요.


-그렇군요. 그 친구는 왜 어머니를 잘 챙기고 싶을까요?



그 질문에 이번에는 선명한 빛의 구가 그 덩어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다는 듯, 활달하게. 말을 걸진 않아도 통통 튀어 다니며 움직였다.



-… 어머니를 기쁘게 만들고 싶나 봐요. 해맑네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단순하게 어머니가 즐거워하면 좋겠다는 마음밖에 없어요.



어이가 없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그렇게 신나 해? 대책 없는 녀석 같으니.



-왜 어머니를 웃게 만들고 싶을까요?


-보람을 느끼나 봐요.


-어머니가 기뻐하시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그러죠?


-얘가 무가치해져요. 쓸모가 없어져요.



여기까지 들은 선생님은 한 번 정리를 해주셨다.



-정인 씨의 두 친구들은,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것 같지만, 무가치함에 대한 공포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 같은 아이들이에요. 대척점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주장을 하지만, 둘 다 목적을 같아요. 무가치함을 느끼고 싶지 않은 거예요.



명쾌한 설명이었다. 놀랍게도 한 번에 이해가 갔다.



-첫 번째 친구는, 어머니로부터 감정적으로 상처받으면 무가치해지는 느낌이 싫어서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피하는 걸 선택했고, 두 번째 친구는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으면 무가치해지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군요.


-맞아요. 이 두 친구는 정인 씨가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네요. 두 친구가 그동안 같은 목표를 위해, 다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고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줄까요?



선생님은 쿠션 2개를 모두 동그란 원형 탁자에 앉히셨다. 항상 문제는 덩어리다. 내 맞은편에 자리한 덩어리를 쳐다보았다.



-첫 번째 친구는, 다 큰 애라 이해를 해요. 근데 두 번째 애는… 얘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두 번째 덩어리에는 일단 귀라는 게 달려있지도 않았다. 내가 그 덩어리를 관찰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나를 보지 못한다. 그 덩어리는 복잡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단세포 생물에 가까웠다. 감정만이 분화되어 만들어진, 사고를 하지 않는 무언가. 이런 게 내 안에 있다니 낯설다.



-서로 이해하지 않아도 돼요. 원래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아이를 이해해 주고 포용할 수 있는 거죠.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요?


-아니요. 그 애도 생존을 위해 노력한 거겠죠.


-그렇죠. 저는 그 아이가 안쓰럽기도 해요. 그 조그만 아이는 어머니가 웃는 모습 그 한순간을 위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안쓰럽다는 말에 내가 썩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선생님께서는 다른 내담자의 사례를 들려주셨다. 다른 아이가 최선을 다해서 엄마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노래를 부르며 노력하는 이야기는 내게 "애쓴다."정도의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 어머니의 따뜻함이 흔하진 않았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똑같은 행동을 해도 본인 기분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가셨어요. 일관성이 없었죠. 적응이 안 됐어요. 그래서 웃어주시는 그 한순간에 더 매달렸던 것 같아요.


-그 아이는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를 위해서 노력한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성인이죠. 정인 씨의 첫 번째 친구도 성인이에요. 성인에게는 어머니의 칭찬이 어렸을 때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을까요?


-아니요.


-이제 정인 씨는 어머니의 칭찬을 받아야만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죠.


-그렇죠. 친구관계, 직장... 다른 관계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말고도, 정인 씨가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줄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이제 그 아이는 꼭 어머니의 칭찬을 갈구하지 않아도 돼요. 어른이 된 정인 씨가 칭찬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어요. 마차를 말 두 마리가 끄는데,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각 끌고 있으면 앞으로 나가지 않아요. 마차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고, 목적지까지는 한참 멀었고, 말은 지쳐있죠. 하지만 이제 우리는 방향을 알잖아요. 두 친구가 다른 방향이 아니란 것을 아니까, 이제 둘 다 서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중요한 건, 마차의 고삐를 잡고 있는 게 정인 씨라는 사실이죠.



이 모든 게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주말에 양가감정으로 머리가 한참 아팠거든요.


-그걸 양극화라고 해요. 두 가지 목소리가 매일 싸우는데 어떻게 속이 조용하겠어요.


-이제 좀 평화를 찾은 것 같아요.


-좋아요. 이렇게 정인 씨 안에 있는 두 친구들을 꺼냈어요.



쿠션 두 개는 여전히 탁자 건너편에 있었다. 더는 내 안에 없었다. 하루 종일 시끄럽게 속을 썩이는 두 친구를 꺼내니 마음이 고요했다.



-이제 오롯이 정인 씨에게 물어봅시다. 만약 친구가 눈 수술을 받는다고 하면 뭐라고 해줄 것 같아요?


-저는 주변 친구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아마 걱정이 되겠죠. 그동안 증상이 있었냐, 진단명이 뭐냐, 무슨 수술을 하는지, 언제 어디서 수술 예정인지 물어보고 보호자가 있느냐, 같이 가줄까 물어볼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


-좋아요. 이번에는 조금 먼 관계, 친구 어머니가 수술을 받는다고 해봅시다.


-음... 그래도 그동안 어디가 아프셨는지, 무슨 수술을 하시는지 이것저것 물어볼 거 같아요. 그리고 괜찮아지실 거다, 쾌차하시면 좋겠다, 말하고 수술이 끝나고 나서도 잘 호전되셨는지 물어보죠.


-정인 씨는 참 다정한 사람이네요.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마음도 많이 쓰고요.



선생님이 나를 바로 쳐다보셨다. 온화한 시선이 닿았다.



-어머니 병원에 동행한다고 해서, 어머니의 꾀에 넘어가는 게 아니에요. 지는 게 아니에요. 방어하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 두 친구들 말고 소파에 앉아있는 정인 씨가 생각을 하고 판단해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그 친절을 어머니에게도 해드릴 수 있을까요?


-...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어머니에게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내가 다정한 사람, 좋은 사람이길 포기할 필요는 없나 보다.



-어머니에게 뭔가를 해드린다, 안 해드린다 보다도 정인 씨가 생각하고 판단하면 돼요. 감정적으로 가까워지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어머니를 챙겨드릴 수도 있죠. 두 가지 목소리 중에 하나만 옳은 게 아니에요. 그 친구들은 계속 말을 하겠지만, 정인 씨는 상황을 보고, 가장 좋은 방법을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을 거예요.



난 무가치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주에 "비싸다"라는 엄마의 말에 버튼이 눌린 듯 화가 났다고 말씀드렸다. 왜 그 단어에 화가 날까 했더니 그 단어를 들으면 내 무가치함을 겪은 상황이 상기되기 대문이라고 설명드렸다. 그 화가 난 스무 살 언저리의 아이들을 저번처럼 편안한 공간에 넣어줬다. 방 2개짜리 오피스텔, 침대와 아이패드만 있는 공간. 사실 내가 당장이라도 현실에서 마련해 줄 수도 있는.(금전적으로 좀 무리해야겠지만... )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도 자신의 말씀을 하셨다.



-저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요. 가끔은 자아도취되기도 해요. 이 세 평짜리 방에서 사람들의 세상을 바꿔준다,라고 스스로 생각해요. 하지만 내담자들의 사례가 제게 자극이 되는 날도 있어요. 그런 날은 저도 괴로워요.



예상외의 말이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상담선생님은 처음이었다. 사실 내담자의 내게는, 상담선생님들은 무척 강인해 보이신다. 오백 년쯤 산 은행나무 고목처럼 뿌리가 튼튼해 보이시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의지가 된다. 어떻게 그렇게 가만히 묵묵히 서 있을 수 있는지 가끔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기대기 힘들어질 것 같기도 해서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상담 선생님들은 항상 내담자들의 삶을 바꿔주시죠. 그런데, 선생님도 자극을 받으실 때가 있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예전에는 자극이 되는 게 괴로웠어요. 상담자 입장으로서는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왜 자극을 받는가 자책했었죠. 하지만 이제는 저를 또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생각하고 있어요. 도움을 청할 곳도 있으니까요. 상담을 업으로 하는 동료도 있고, 제게는 아직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슈퍼바이저도 있고, 제가 지도를 하는 슈퍼바이지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어요. 그런 자극까지도 나를 상담자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거든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당장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다시 눈앞이 번뜩이는 기분이 들었다.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렇죠. 방향이 중요하죠. 어떻게 지금의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내가 나쁜 사람이란 건 아니다. 단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 계속 노력을 하면, 점점 그에 가까운 사람이 되겠지. 지금의 내가 서 있는 위치보다 앞으로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내 가치가 당장 지금의 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내 안의 목소리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느낌이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 난 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이 무언가의 고통에 또 다른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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