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세션이 끝나고 두 번째까지는 일주일의 간격이 있었다. 나는 그 일주일 사이에 괜찮았다가도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을 때도 있었다. IFS치료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번에 들었던 "아이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않으려 해도 된다."라는 그 한마디에 항상 잔잔히 끓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감정의 뚜껑이 휙 하고 열렸다. 그 뚜껑이 벗겨지고 마주한 나의 감정들은 잔잔하긴커녕 용광로 쇳물처럼 시뻘겋게 끓고있어 부글부글 소리가 났다. 열기에 손을 델 정도의 강도였다. 그동안에 내가 이렇게 화가 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다." "부모님도 최선을 다하셨다."같은 부모님을 옹호하려는 목소리는 내가 그 냄비 속을 보지 못하도록 스스로 덮어놓은 위장막 같은 거였나 보다.
두 번째 세션을 시작할 때 이러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선생님은 잠자코 일주일 동안의 내 심리 변화 과정을 들으시다가 첫 번째 세션에서 우리가 무엇을 함께 발견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하셨다. 저번에는 응접실 같은 곳에서 상담을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정말 소파가 있는 상담실로 들어가서 상담을 했다.
-저번에 맡기고 돌아간 아이는 잘 있나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동안 처박아놔서, 방치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요.
-그 말을 그 아이에게 해주세요.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참 어렵다. 아이에게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설명을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이 좀 흐른 후 입을 뗐다.
-아마도 맥락을 이해하진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을 포착하는 게 엄청 빨랐거든요. 아마도 제가 미안하다는 것 정도는 알 거예요.
-그럼 그 아이를 안거나, 어깨에 손을 얹거나 하면서 감정을 전달해 봅시다.
음. 어깨에 손을 얹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어깨에 손을 얹는 건 필연적으로 내 시야 밖, 머리 뒤편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늘 내 뒤통수에서 벌어지는 일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래서 그냥 아이를 안아주었다. 상상 속인데도 아이는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았다. 대체 뭔 일인지 파악은 못한 채로 눈을 둥글둥글 굴리며 안겨있었다.
-이제 그 아이도 말할 준비가 됐을까요?
-아마도요.
-그 아이가 어머니한테 뭔가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 같아요?
-... 잘 모르겠어요.
-뭐든 좋아요. 때리지 말라고 해도 좋고, 왜 수학문제 가지고 이렇게 혼나야 하냐 해도 좋고, 할머니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해도 좋아요.
-하지만 할머니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듣지 않으셨잖아요...
선생님은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하는 게 계속 내 치유 과정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신듯 했다.
-우리는 TV 속 방송 출연자예요. 정인 씨의 어머니는 TV 밖에서 보고 있어요. 우리의 말은 어머니가 들을 수 있지만,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해도 우리는 듣지 않아요.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은 진짜 어머니 앞에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당시 어머니에게 지금의 정인 씨가 말하고 싶은 게 있나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린애한테...라고 할 것 같네요. 참 원망스러워요.
-그렇군요. 어린 정인 씨도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봐주세요.
이상하게도, 뭐라고 대답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대답을 했고,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셨다.
-어머니는 문제를 틀리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셨죠.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그건 아이들의 학습에 더 악영향을 끼쳐요. 아이들이 공포에 꽁꽁 얼어버리니까요.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불안해서 다 잊어버리죠. 부모님들은 그걸 오히려 멍청하다고 더 화를 내요.
-맞아요... 물론 시험을 못 보진 않았지만, 집에 와서 다시 풀어보면 다 맞을 수 있는 것들이었거든요.
-시험을 볼 때 시험 보는 순간에 집중한다기 보다도, 이 문제를 틀렸을 때 그 결과와 여파에 대해 계속 신경이 쓰이니까요.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불안에 마음이 가 있으니까 당연한 거예요. 절대 애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사실 제가 제 스스로의 성적이 좋든 안 좋든 그렇게 스트레스받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제 성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부가적인 결과들에 항상 엄청 불안해하면서 시험을 봤어요.
-그걸 상태불안이라고 해요. 가만히 앉아서 봐도 어려운 시험을, 내내 손이 떨릴 만큼 불안에 시달리면서 보면 잘 볼 수가 없어요. 공포는 학습에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이에요. 틀리더라도, 원래 시험을 보는 목적은 무엇을 모르는지를 발견하고 그걸 공부하기 위한 거니까 틀리는 게 당연하죠. 정인 씨가 그 자리에서 문제를 풀지 못한 건 정인 씨의 탓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원래 잘 몰라요. 아이를 가르쳤는데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이의 탓인가요?
-아니요. 가르치는 사람이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아이는 모르는 게 당연해요. 아이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안 배운 게 뭔지도 몰라요. 어른은 그 아이를 가르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죠. 그러니 그 책상에 앉아있던 정인 씨는 잘못이 없어요.
그렇구나. 다시 아이를 끌어안았다. 얘, 네 탓이 아니야. 그때 벌어졌던 모든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너 안 못했어, 너도 알지? 솔직히 너 잘한 거 알잖아.
-다시 되짚어보자면 정인 씨는 그때 어머니가 나 때문에 화내고 있다는 죄책감, 다른 사람 앞에서 혼나야 하는 수치심, 할머니가 나 때문에 같이 혼나야 하는 무력감,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은 기분, 그런 걸 느끼고 있었죠. 어머니는 정인 씨한테 "네가 멍청해서 그래."라고 하셨지만 이제 거기에 반박할 수 있어요. 반박해 봅시다.
-.......
-우선은 넌 멍청하지 않아,라고 아이한테 알려줘 볼까요?
-선생님, 실은요, 제가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은 예전에도 알고 있었어요. 방금 떠올린 건데,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다니던 학원은 월간평가를 쳐서 학원수강생들의 성적을 1등부터 500등까지 모조리 벽에 붙여놨었거든요. 전 거기서 괜찮게 했어요. 사실 저는 평생 중상위권이었어요.
-중상위권이면 객관적으로도 잘하는 거죠.
-거기다 대치동에서 중상위권이면 더욱 그럴 거예요. 하지만 제가 못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그냥 집에 들어오면, 덜 떨어진 애가 되니까... 어머니 앞에만 서면 멍청하고 모자란 애가 되니까 그게 슬펐던 거 같아요.
-어머니 앞에서는 공포에 질리니까요.
-음, 선생님. 방금 머릿속에서 꼬마전구가 반짝한 거 같아요. 제가 못하지 않은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는 걸 오랜만에 기억해서인가 봐요.
오랜만에 발견한 사실에 꽤 즐거웠다. 선생님은 이제 죄책감, 수치심 등 아이가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나열하시면서 이제 사라지게 하자고 하셨다.
-보통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많이 써요. 불에 태워도 좋고, 깊은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좋고, 바짝 말려서 가루가 되게 하는 것도 좋죠.
-햇빛에 바짝 말리는 거 좋아요.
-그럼 적당한 곳을 생각해 봅시다. 사막 같은 곳도 좋아요.
-빨랫줄에 걸어놓으면 잘 마른 거 같아요.
-그럼 그 감정들을 빨랫줄에 하나하나 빨래집게로 걸어놓읍시다. 화창한 날씨에 햇빛은 쨍쨍하고... 말려서 없애버려요.
한참 생각하다가 인상을 썼다.
-지금은 잘 말리고는 있는데... 먹구름이 끼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워요. 잘 마르지 않으면 어떡하죠?
-불안하군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여긴 정인 씨 마음속이에요. 정인 씨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날씨 같은 건, 정인 씨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죠.
물론 그 말을 듣는다고 그물그물 어두워지는 하늘이 걷히진 않았다. 내 사전에 맑기만 한 하늘은 없었다... 나는 조금 조급해져 비가 오기 전에 그 종이들을 다시 걷어 잘게 찢어 바람에 날려버리는 상상을 했다. 멀리멀리, 날아가. 다시는 볼 수 없게.
-다 없어졌어요.
그리고 선생님과 수치심, 죄책감 등을 긍정적인 감정(할머니에 대한 사랑, 열심히 노력했다는 자부심 등)으로 하나하나 치환을 했다. 그 과정을 마치고 선생님이 물으셨다.
-기분이 어때요?
-후련하네요. 이제 그 애는 책상에서 일어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그래요. 이제 그 아이를 독립을 시켜줍시다. 그 아이가 살고 싶어 하는 곳을 생각해 봐요. 공주님이 사는 마법의 성이어도 좋고, 번쩍번쩍한 대저택이어도 좋죠.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곳도 괜찮아요.
하지만 내 상상력은 너무 빈약했다... 어렸을 때라고 딱히 상상력이 넘치지도 않았다.
-산속 통나무집 정도가 좋아요.
-그리고 가장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무엇이 있나요?
-음... 잔병치레할 때 밤을 새워서 간호해 주셨던 거요. 그리고... 끼니를 잘 챙겨주셨던 거요.
-그럼 간호해 주던, 가장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만 모아놓은 그 어머니랑 그 통나무집에 살게 해 줍시다.
-아, 동생들은 필요 없어요. 다 없애버릴래요.
선생님이 웃으셨다.
-그래요. 아이과 다정한 어머니만 둘이서 통나무집에 사는 거예요. 이제 그 공간을 아이가 좋아하는 걸로 채워보아요. 엄청 많은 장난감, 캐노피가 달린 침대, 창이 커서 볕이 잘 들어오는 것도 좋죠.
-햇빛 잘 들어오는 거 좋아해요. 그러니까 엄청 큰 창을 내고... 한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울래요. 그리고 초콜릿도 잔뜩 쌓아두고요.
-더 필요한 건 없을까요?
-글쎄요. 그 애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가 필요하다는 욕구를 잘 모르는군요.
-그보다 뭔가 이루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도 좌절이 되는 경험이 많아서 그럴 것 같아요. 아마도요.
-그럴 수도 있죠. 지금 아이는 그 집에서 뭘 하고 있나요?
난 아이를 눈짓했다. 아주 천하태평이다. 제 세상이다 이제. 아까 분명 생각했던 다정한 엄마도 통나무집에 없었다. 아이는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래도 되나? 너무 태평해 보여서 걱정이 됐다.
-벽난로 옆 소파에 엎드려서 초콜릿을 까득까득 씹으면서 책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 이러면 애가 영원히 안 자랄 거 같아요. 학교도 가기 싫고, 집밖으로 나가기도 싫고, 영원히 저러고 있을 것 같은걸요.
-아이다운 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리고 마음속인데 학교 안 가도 되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돼요. 원하는 만큼 좋아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줍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작별인사를 할 거예요.
-애를 거기 두고요?
-아이는 행복하게 있을 거예요. 나중에 찾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어요. 우선 이제 그 집에서 나옵시다.
꽤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상 속의 통나무집에서 나왔다. 애는 내가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책에 몰입해 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필요한 모든 게 갖춰진 집이다. 지금의 나도 얹혀살고 싶을 정도로. 잘 살겠지.
-되게 신기한 게, 분명 이 기억 하나만 바꿨는데, 다른 기억들의 감정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요. 저녁식사 때 "숙제를 최선을 다해서 했어."라고 했더니 아빠가 "네깟게 어디 최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라고 화내서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 애도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걔도 분명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거든요.
-우리가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 아이를 찾은 건 그래서 그래요. 마음속 아이들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어렸을 때 작은 걸 바꾸면, 미래의 더 많은 게 바뀌잖아요.
-나비효과처럼요.
-맞아요. 그래서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하나하나 위로해 주고 돌봐주는 거랍니다.
-이제는 저번에 오래 시간을 쏟지 못했던 화내는 친구를 다시 볼까요? 화내는 친구는 정인 씨가 의견을 표현하는 걸 돕고 있었어요. 그 화내는 친구한테는 어떤 감정이 들어요?
-잘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마울 정도죠. 화를 안내면, 꿈틀이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당하거든요.
-그 친구한테도 그럼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세요.
-얘는 이미 알고 있어요. 자기가 잘 일하고 있다고 엄청 자신만만해보이기도 해요.
-좀 전의 대화에서 화를 내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고 느낀 상황이 있던 것 같아요. 그 때가 언제일까요?
-대학생 때였어요.
-하지만 지금 정인 씨의 분노 방어기제는 누가 툭 칠 것 같으면 먼저 공격을 해서 자신을 지키잖아요. 그런 기제는 어렸을 때 발현돼요.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성인의 방어기제는 공격적이지 않아요. 말을 못 하는 애일수록 더 공격성이 강하죠. 어쨌든 제 생각에는 좀 어렸을 때의 기억일 것 같은데요.
그런가?
-정확히는 화를 내지 않아서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대학생 때였어요. 그전까지는 몰랐어요. 대학생 때 처음으로 엄마가 때리려는 걸 막았거든요. 사실, 신체적으로 비등비등해진지는 오래죠. 그래도 안 맞으려고 피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쨌든 처음으로 반항을 했는데, 어머니가 가방을 제 머리에 가방을 뒤집어씌우고 주먹을 막지 못하게 한 후 때리셨어요. 그런 걸 두어 번 하고 나니까 이제 얌전히 맞아주지 않는다는 걸 아셔서 안 때리시더라고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맞았는데, 진작 공격했었으면 맞지 않았겠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실제로 어머니를 때려서 맞지 않은 형제도 있으니까요. 남동생은 다섯 살 때 어머니 눈을 쳤어요. 그래서 어머니 한 쪽눈은 지금 시력교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시각이 손상되었죠. 어머니는 그 이후로 남동생에게 손을 올리지 않으셨어요. 전 그 애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참 싫어요.
-하지만 다섯 살짜리가 사람 눈을 치면 실명이 될 수 있다,라는 결과를 알고 행동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요. 걔가 나중에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맞기 싫으면 누나도 엄마 때리지 그랬어!라고 했어요.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요. 걔는 어렸을 때부터 말썽이었어요. 어머니가 칭찬스티커를 모으면 장난감을 사준다고 했다고, 어머니 외출하시자마자 찬장 위에 숨겨둔 스티커를 찾아서 모조리 붙인 다음에 당당하게 장난감을 요구하던 애였어요.
-아이는 그럴 수 있어요. 욕구가 앞선 거죠.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구조가 아니라 단순히 "스티커"를 모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어른들의 대응이 중요한 거죠. 이 계약은 유효하지 않다,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알려줬어야 행동 교정이 돼요.
아이는 다 그럴 수 있다고, 선생님은 굉장히 수용적이셨다.
-어머니의 눈을 친 것도, 정말로 동생이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까요? 죄책감은 느꼈지만 내가 살아남아야 하니까,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했을 거예요. 보통 동생들은 첫 째를 보면서 자신들만의 생존방식을 터득해요. 아마도 남동생은 정인 씨가 가만히 맞는 장면을 보면서 맞지 않으려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익혔을 거예요. 사실 어린 정인 씨도 알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부모님을 공격하면 오히려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요.
내 머리로는 삼십 년간 이해할 수 없던 남동생의 입장을 선생님이 대변해주시고 있었다.
-그걸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또한 생존 전략이에요. 모든 형제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떨 것 같아요? 부모가 애들을 버릴 수도 있죠. 그러면 살아남기 힘들 수 있죠. 그래서 생존전략 상 자식 한 명 정도는 부모님의 기쁨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어있어요. 정인 씨의 경우에는 그 자식 역할을 맡은 거예요. 어머니는 때려서 말을 듣는 게 그 착한 자식 한 명밖에 없다면 그 자식한테 더욱 집중하게 되는 거고요.
-여동생도... 말을 적당히만 들었었어요. 제가 돈이 없어서 친구랑 카페도 가지 못할 때도, 부모님이 돈을 안 줘서 돈이 없다고 핸드폰 결제로 100만 원씩 쓰면서 집 밖으로 나돌았죠. 근데 그래도, 제가 늘 더 맞았어요. 이렇게 보니까 정말 때려서 말을 듣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네요.
그렇게 된 일이었군. 이제 이해가 갔다. 아마도 남동생은 말을 잘 들어서 더 맞는 큰누나, 말을 애매하게 들어서 덜 맞는 작은 누나를 다 보고 자기 나름의 안 맞기 위한 전략을 택했을 것이다. 난 아마도 그걸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내 분노하는 보호자 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발달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분노하는 친구가 자꾸 운전대를 잡고 있잖아요. 자꾸 경적 빵빵거리면서 맘대로 운전하고 있죠. 하지만 차 주인은 누구죠?
-저예요.
-그렇죠. 정인 씨죠. 그러니 이제 그 화내는 친구한테 이제 정인 씨가 어른이 됐다고 좀 알려줄래요?
저기, 있잖아, 나 이제 서른이야. 왜 나만 맞냐고 화내면서 씩씩대는 아이한테 입을 뗐다. 아이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네가 진짜 서른이라고? 응. 서른이면 진짜 어른이잖아? 그렇지. 스무 살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어른이지.
-좀 놀라워하네요. 정말 몰랐나 봐요.
-그렇죠? 지금까지 정인 씨가 어른이 된 것도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정인 씨가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고, 비켜달라고 합시다.
-비키긴 하지만 엄청 의심스러워하는데요.
-처음이니까요.
-뒷좌석에서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고 있어요.
음,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정인 씨는 잘할 거예요. 보다 보면 그 친구도 마음 놓고 운전을 맡기게 되겠죠.
그러고 선생님은 이번 주의 과제를 내주셨다.
- 화가 날 때, 화내는 애가 운전대를 잡으려 할 때, 차 주인은 정인 씨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세요. 화만 내서는 일이 잘 돌아가지 않잖아요. 화내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그 친구가 운전을 할 때는 액셀 브레이크 팍팍 밟아가면서 누가 건들기만 해도 화를 버럭 냈다면, 정인 씨가 운전대를 잡으면 이제 1만큼 화내야 할 때 1만큼 화낼 수 있어요. 10만큼 화내야 할 때는 10만큼, 상황에 맞게 적당한 정도로 정인 씨가 조절할 수 있어요. 이번 주에는 이걸 연습해 봅시다.
그렇게 두 번째 상담이 끝났다. 이렇게 눈물이 안 나오는 상담은 처음이다. (안 울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보통 상담이 끝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데, 머릿속이 좀 말끔하다. 뭔가 잘 정리가 되는 느낌이어서 상담실을 나오면서 마음이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