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S(내면가족체계치료, Internal Family Systems Therapy)라고 부르는 트라우마 치료 상담 기법이 있다. 본인이 생각하셨을 때 가장 인격적인 트라우마치료법이라고 정신과 의사선생님께 추천받았는데,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보니 정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서 내담자 입장에서의 기록을 남겨본다.
수요일 저녁 7시, 퇴근을 하고 헐레벌떡 뛰어와서 숨이 찬 내게 상담사 선생님이 따뜻한 차를 내주셨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시는 동안 간단한 설문지(신상정보, 가족관계, 상담을 다 마치고 기대하는 것, 나의 장점과 자원들 등)를 작성했다. 토요일 정신과 진료 때 상담소 전화번호를 받고나서, 월요일에 당장 연락해서 수요일 저녁으로 급하게 잡았다. 주말 일정은 2주 뒤나 가능하다 하셨지만 도무지 그 때까지 기다릴 재간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상담 일정을 촉박하게 예약한 이유로 최근에 있었던 갈등으로 어머니 얼굴을 보기가 괴롭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와 같이 있지 않을 때는 어머니가 지금 당장 쓰러진다해도 상관없을정도로 모르는 사람만큼이나 멀게 느껴져요. 제가 몹시 어머니에게 냉담하다고 느끼지만, 정작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화가 나요.
-화가 나면 어때요?
-눈물이 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그래서 대면하지 않으려 해요. 사실은 얼굴 보는게 너무 힘들어서 경제적으로 무리하더라도 집을 구해서 따로 살아야하나 고민중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이 사건 자체가 이 정도로 내가 반응을 해야하는 사건이 아닌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되게 사소한건데, 왜 감정이 오락가락하는지 혼란스러워요.
-정인 씨를 지켜주려 하는 보호자(protector)들이 참 많아요. 다들 의욕이 넘치네요. 그 친구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혼란스러운거에요. 오케스트라로 생각해볼까요? 심벌즈를 치는 친구가 처음에 자기 파트를 잘 수행했더니 박수를 받았어요. 뿌듯했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자기 파트가 아니더라도 맘대로 치고 있어요. 곡이 제대로 흘러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오케스트라에는 지휘자가 있어요. 정인씨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정인씨라는 걸 기억해야해요. 바이올린, 심벌, 피아노, 모든 친구들이 다 필요하지만, 본인의 파트가 아닐 때 나와서 주도권을 잡으려한다면 지휘자가 중재를 해야하는 거죠. 자, 일단 방금의 대화에서 언급된 보호자들을 하나씩 분리해볼까요? 먼저,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마비시키는 친구가 있네요. 고통을 피해서 도망가려는 친구도 있고요. 화를 내는 친구도 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걸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판단하는 친구도 있어요. 제가 잘 따라가고 있는게 맞을까요?
-네.
-다행이네요. 오늘은 여기서 화를 내는 친구를 데려와볼까요?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은 6인석이었고, 선생님은 일어나셔서 의자를 손수 하나하나 빼셨다.
-나머지 친구들은 여기 앉혀놓고, 우리는 화가 잔뜩 나 있는 친구랑 이야기를 해봅시다.
-화가 나지만 화내려 하지 않고 그냥 방에서 혼자 화가 나있어요. 저번주 일요일에는 부엌에 나가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엄마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하는 일에 소모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방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씩씩대고 소리 지르는 게 들렸어요. 하지만 그 순간은, 엄마가 제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할 게 신경쓰이지 않았어요. 저는 화가 나서, 제 입장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뿐이에요.
-아주 좋아요. 정인 씨의 화내는 친구는 정인 씨가 표현하는 것을 돕고 있네요. 자기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하고 있어요.
난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싫다. 부모님처럼 행동하는 내 자신이 무섭다.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을 해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까봐 무섭다.
-그런데... 제가 화를 아예 안 내진 않는 거 같아요. 어머니가 제 영역을 침범할 때, 또는 공격하려 드는 것 같은 낌새를 보이면 먼저 화를 내요. 그러면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하시거든요. 어머니는 그런 제게 너무 칼 같다고, 무슨 말을 못하겠다고 하세요.
-공격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드면 먼저 공격하는군요. 그리고 그게 효과적이라고 느끼고 있고.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뭘 어쨌다고, 하면서 억울해 하세요.
선생님은 본인의 컵을 식탁 한가운데로 밀어놓으셨다.
-정인 씨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이 컵 가득,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차 있다고 해봅시다. 그 컵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결국 그 물이 흘러넘치면, 그건 그 한 방울 때문이 아닌 걸까요? 정인 씨 어머니는 그 한 방울을 컵에 부으신거에요. 자,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정인 씨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들여다봅시다. 어떤 것이든 좋아요.
나는 수학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내 욕을 했던 기억들을 말씀 드렸다.
-그 때 무슨 감정이 들었나요?
-수치스러워요. 내가 수학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하는 것을 봤어야했어요. 문제를 못 풀어서 맞는건 괜찮았는데... 이럴 땐 많이 힘들었어요. 어머니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애원해도 제가 문제를 잘 풀었으면 전화할 일이 없지 않냐고 빈정대시고... 무력해요. 할머니가 사과해야하는 상황을 만든 나 자신이 너무 미워요. 사실은 엄마가 화나는 상황을 만든 저 자신이 싫어요.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래요.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있나요?
-...책상에 그냥 앉아있어요.
-그 애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어차피 그 애한테는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거에요. 걔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못해요.
-하지만 정인씨는 어른이잖아요. 어른은 그 애를 지켜줄 수 있어요. 그 아이에게 이제 안전하다, 네 탓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해보는 건 어때요?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잡고 한참을 눈만 깜빡거렸다. 머릿속이 조용했다.
-...모르겠어요. 걔는 안전한게 뭔지 몰라요. 그런 걸 겪어보지 못해서,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거에요.
선생님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상담실에 연결되어있는 치료실의 문을 여셨다.
-와서 볼래요?
난 조심스럽게 치료실을 기웃거렸다. 작은 치료실 가운데는 탁자가 있었고, 왼쪽 벽에 있는 책장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피규어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우와! 피규어가 엄청 많네요.
-어때요?
-밝고 따뜻하고 안전해보여요.
-정인 씨가 그 애한테 지금 당장 말을 전달하기 힘들다면 제가 잠시 그 애를 맡고 있는 건 어떨까요? 이 방에 그 애를 두고가면 어떨 것 같아요?
가슴이 갑자기 쿵 뛰었다. 그렇게 두고 갈 수가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나도 그 애한테 안전한 환경을 줄 생각을 안했었다. 지금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침대 아래 깊숙한 곳에 그 아이를 처박아놨었다. 마주하면 아프고 힘든 기억이니까. 하루종일 혼만 나던 그 책상에서 초등학생 아이는 이십 년 째 홀로 앉아있었을까. 아무도 이제 책상에서 일어나도 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이제는 널 꺼내줄 수 있어. 외면해서 미안해. 다시 원래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와 훌쩍이며 말했다.
-좋아할 거에요. 물도 마시고, 피규어 구경도 하면서 놀 거 같네요.
-그럼 제가 잠시 맡는 걸로 하죠. 다음에 괜찮아지면, 다시 데려가면 돼요.
상담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이런 저런 예전 기억들이 개울가에 비치는 햇빛처럼 하나씩 퉁겨져나왔다. 예전 일들을 잔뜩 늘어놓고나서, 난 괜히 멋쩍어져 한마디 덧붙였다.
-부모님을 이해해요. 그 분들도 많이 힘드셨겠죠.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의 표정이 굳으셨다. 시종일관 온화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강인함 같은게 얼굴에 자리잡았다.
-정인씨, 아이는 부모를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정인 씨는 아이였고, 부모님은 어른이었어요. 성인과 아이의 다른 점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거에요. 아이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야하지만 성인은 아니에요. 성인은 얼마든지 더 나은 길을 찾고, 선택하고, 고민할 수 있어요. 정인씨 부모님도 분명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정인씨의 부모님이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걸 정인씨가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성인은 아이를 이해해야지만, 아이가 성인을 이해해주지 않아도 돼요. 어렸을 때의 일들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아이들은 도무지 그 상황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지금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할 거 같아요?
-굳이 안 만나겠죠.
-그쵸. 이제는 안 만나는 걸 선택할 수 있어요. 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만큼 그 상황이 두렵지 않은거에요.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느 정도는 넘길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라면 그렇지 않겠죠. 눈 뜨고 당해야해요. 속수무책이겠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공포가 더 각인되는 거에요.
-하지만, 마음속에 자꾸 부모님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있어요. 부모님을 이해해야지, 힘드셨겠지, 그런 말들이요. 그래서 미운데도... 미워하기도 힘들어요.
-아이는 혼자 살 수 없어요. 부모님이랑 싸웠다고 아이가 집 밖으로, 들판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밖은 더 무섭죠. 맹수에게 잡아먹혀요. 그래서 집이 안전하지 않은 환경이더라도, 보호자가 안전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아이는 어떻게든 보호자에게 애착을 형성해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런 노력을 해요, 아이는. 내 보호자가 좋은 사람이고 나를 사랑한다 스스로 믿으려 하는거죠.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요.
다시 원래대로 주제가 돌아왔다.
-정인 씨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 중 몇몇 친구한테는 좀 정보를 업데이트시켜줄 필요가 있어요. 아이를 지키는 것과, 어른을 지키는 것은 많이 다르죠. 아이는 생채기가 나지않게 보듬고 철저하게 싸고돌아야하지만, 어른은 어느정도 스스로 방어할 수 있으니까요. 와이파이 연결이 안되어서 업데이트가 한참 지연됐다고 생각해봅시다. 연결이 끊겼던 몇몇 방어기제들은 아직까지 아이로써의 방어를 하고 있을거에요. 그래서 툭 치는 것으로도 "우리 애 건들지마!"라고 과하게 화내는 거에요. 그런 친구들한테 알려주면 돼요. "나 어른이 됐어. 아이가 아니야. 그래서 이제 선택할 수 있어. 그렇게까지 나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라고요. 그러면 머쓱하게 "오, 그래? 몰랐네."라고 하고 조용해질거에요. 이 친구들도 정인씨를 지키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이제 짐을 덜어줍시다.
아까의 치료실을 흘끗 보았다. 어린 내가 심심해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동굴 속에 방치했나봐요. 하나씩 꺼내서 햇빛도 쐬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려줘야겠어요.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상담소를 나오며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옛 기억 속 나는 안전한 곳에서 별 걱정없이 놀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걸 드디어 해준다는 것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도무지 이 기억들을 껴안고 평생 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여기저기서 기억들이 아우성칠 때마다 조용히 하라고 소화기로 진화작업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작은 불씨가 산불 급으로 번지고 나니 열기에 못이겨 혼자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기억을 소거할 수도 없으니, 내게 과거는 평생 안고 살아야할 짐덩어리였다. 트라우마 전문 상담소여서 비용이 적지 않았기에 지갑 사정까지 가벼워진 상태지만, 괜찮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들이었다. 우울증이 심할 때는 내일 복권 당첨이 된다해도 내일까지 살고싶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게 대수일까. 내 삶은 앞으로 아마도 한참 남았을텐데 그 기간을 좀더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면 이 비용 쯤은 30년 할부로 지불한다 생각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