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한 해의 끝. 상담세션에 처음으로 지각했다.
오늘 말해보겠다고 다짐했던 주제가 있었는데 항상 그렇듯 자연스레 근황 이야기로 넘어가다 보니 다른 내용으로 흘러갔다.
-어제는 어머니가 수술 f/u을 다녀온 날이었어요. 어머니가 어제 저녁에 아버지와 제가 다 같이 앉은 식탁에서 병원에서 웃긴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안과의사가 진료 중에 “이제 힘들어서 은퇴하고 싶다”라고 하소연을 해서 어머니가 “아드님한테 병원 물려주지 그러세요.”라고 하셨대요. 그 의사가 피식 웃으면서 “아들은 제가 오래오래 일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라고 답했다는데... 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웃기다는 거예요. 전 진짜…
한숨이 나왔다.
-그런 이야기는 저희 집에서 민감한 주제예요. 아버지는 바로 “부모가 열심히 일하면 자식들이 다 놈팡이가 된다, 우리 집을 봐라, 자식들이 다 망했지 않느냐. 그러게 누가 대치동에서 애를 키우냐. 대치동은 노후 보내러 오는 곳이다. 내 주변에서는 사업이 어려워진 친구들 자식들은 자기 살 길 찾으려고 다 열심히 해서 서울대 의대를 가더라."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조금 짜증이 났어요. 안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듣는 이야기를 굳이 어머니가 말을 해서 또 듣는 거죠. 진짜… 아버지도 참, 그 망한 자식 농사 결과물이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잘도 그런 말을… 원래 하시던 분이었지만요. 아무튼. 저는 거기까지만 듣고 방에 들어왔어요. 어머니는 20분이 지나서 제 방으로 왔고요. 와가지고는 또 네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했다고 징징거리는 거예요. 뻔하죠. 아마 "네가 잘못 가르쳐서 애를 버려놨다. 네가 학원비에 돈을 써재꼈다. 내가 애 키웠으면 애들 다 서울대 갔다." 그런 말을 들었겠죠. 예전 같으면 어머니 편을 들어주면서도 속으로는 죄책감과 분노에 시달렸을 것 같은데 이젠 좀 성가시고 짜증이 나서 어머니한테 그랬어요. "엄마한테 뭐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그런데 엄마가 그 얘기를 하면 아빠가 정말 아무 말도 안 하고 거기에 웃을 줄 알았어?"라고요. 또... 그렇다고는 또 말을 못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렇게 길게 말할 줄은 몰랐지."라고 대답을 작게 해서 “삼십 년을 같이 살아서 아빠가 뭐라고 할지 다 예상을 했는데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듣고 나한테 와서 서럽다고 하는 거야?”랬더니 자기는 너무 웃긴 얘기라 꼭 말하고 싶었대요. 예순이 다 됐는데 할 말과 못 할 말,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가릴 능력이 없나 보죠. 단호하게 제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어요.
말하다 보니 화가 나서 물이 엎질러지듯 말을 빠르게 쏟아내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뭐였어요? 화가 났나요?
-화보다는 짜증, 귀찮음, 지침, 그런 거요.
-하지만 짜증도 화의 일종이죠. 그렇죠?
-그래도 전처럼 화가 많이 나진 않아요. 어머니도 분명 아버지의 반응을 예상하셨을 건데 왜 자꾸 자극을 할까요?
-아이들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죠. 이야기도 하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지만… 다른 아이들 노는 데에 훼방을 놓는 아이도 있어요.
-아, 알 것 같아요. 관심을 받고 싶어서요?
-네. 그러면 애들이 야! 하고 화를 내면서 자신을 주목하니까요. 정인 씨의 어머니도 그러신 게 아닐까요? 아버지가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으니, 부정적인 반응이 예상되더라도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원하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거죠.
…아. 선생님이 들어주신 예시에 이제 이해가 조금 갔다. 불구덩이에 불쏘시개를 열심히 넣으면서 뜨겁다고 내게 징징거리는 어머니는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아버지가 뭐라도 주목하거나 관심을 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거지. 그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것을 예상할 수 있을지라도.
-그래놓고는 오늘 제 방에 와서 너무 우울하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못 살 거 같다, 이러는 거죠. 병원 갈 생각도 없으면서. 제가 다니는 병원 소개도 해주고, 상담도 알아보자고 해도 자기 그 정도 아니고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왜 저한테 계속 우울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떠한 노력도 스스로 하고 있지 않잖아요. 만날 몸이 아프다, 자기는 아무것도 못한다, 나가서 돈 벌어올 능력도 없다, 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독립적인 개체가 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본인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의지도 없어요. 듣다 듣다 지쳐서 제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더니, 제가 본인을 괄시한다고 중얼거리면서 나가시더라고요. 와. 괄시. 그 단어가 참… 구어체로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 용케도 쓰셨어요. 어머니를 괄시하는 건 아버지인데, 왜 딸한테 와서 괄시한다고 서운해하실까요? 왜 저한테 그러시냐고요 대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제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저렇게 저한테 와서 징징댈 때마다 이혼하라면서 편을 들어주고, 아버지 험담을 같이 해주고 했는데 저도 사람이라 지쳐요. 그래서 몇 년 전, 또 싸웠다고 한 날에는 둘이 그냥 평생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라고 했더니, 배신감 느꼈다고 어떻게 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이혼하라 해도 어차피 할 의지도 없고 핑계만 대면서 안 할 거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하니까 서운하다는 게 말이 되나요? 어머니는 그냥 아버지한테 하대 받고 딸한테 위로받는 불쌍한 자신에 심취한 것 같기도 해요. 솔직히 말하면, 오늘 우울해서 죽고 싶다고 하신 게 진짜도 아닌 거 같아요. 항상 우울하다 우울하다 얘기하다가 제가 요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지 않으니까 반응을 얻고 싶어서 저를 더 자극하시려고 죽고 싶다고 한 거 같아요.
다다다다 이야기를 쏟아내고 숨을 골랐다. 선생님은 늘 그러셨듯 내가 하는 말속에 섞인 감정들을 하나씩 나열하셨다.
-지금 정인 씨 안에는… 어머니 얘기 들어주는데 지쳐있는 아이가 있네요. 그리고 이렇게 하는 어머니의 목적이 대체 뭐지 의심하는 아이도 있고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벽을 치는 아이도 있어요.
-셋 다 기능을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저는 상처받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이 중에서 어떤 아이랑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두 번째로 가볼까요?
-그래요. 방금 어머니가 죽고 싶다고 한 게, 정인 씨를 자극하려고 한 것일 거라 말했었죠. 어머니의 목적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단정 짓네요. 그 의견에 근거가 있을까요?
-솔직히 궁금하지 않아요. 그냥 알 수 있어요. … 근거는 없어요. 그러네요. 그런데 근거는 없어도 경험상으로 알 수 있어요. 반복되는 패턴이 있으니까요.
-그래요. 근거는 없어도 그냥 알 수 있는 게 있는 거죠. 얘는 단순히 목적을 단정 짓는 게 아니라 상황을 분석하는군요?
-네… 사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부분이에요. 상담을 하기 전에는, 어머니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분석할 수도 없고 감정에 매몰되기 바빴는데, 이젠 어머니의 전략을 알고 심적으로도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나니까 남은 공간에 상황을 분석하려는 애가 생겨났어요.
-하지만 아이가 굉장히 강경해 보여요. 왜일까요?
-어머니에게 틈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틈을 보이면… 또 예전처럼 휘둘릴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예전처럼 또 화가 나고, 얽매이고, 예전과 동일하게 반복될 것 같아요. 아시겠지만… 제가 어머니가 저를 휘두르는 것에서 벗어난 지가 갓 한 달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뒤를 돌아보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너무 가까운 과거니까요.
-만약에 다시 휘둘리게 되면요?
-자괴감이 들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젠 배웠잖아요. 안 휘둘리는 방법을. 배웠는데도 실행을 안 해서 문제가 생기면 제 잘못이죠… 아, 내가 또 넘어갔어, 배운 것도 제대로 못했어,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아요…
-자기를 비난하게 될 것 같군요.
-네…
선생님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얘기를 가만히 들으시다가 내가 아까부터 왜 우는지를 물어보셨다. 난 내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울고 있는데, 슬퍼하는 애가 있나요?
-그냥 말하다 보니까 눈물이 나는 것 같은데요. 어머니가 제 방에 왔을 때는 안 울었어요.
-그래도요. 정인 씨의 어떤 부분이 슬퍼하는 것 같아요?
-딱히 슬프지 않은데 모르겠어요.
-혹시 정인 씨 안에서, 어머니가 정말 죽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이 있나요?
-아니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생각을 몇 번 했었어요. 어머니가 정말 죽으면, 그러면.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물론 정인 씨 잘못은 아니죠. 하지만 잘못과는 별개로 그래도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음... 저도, 자살하겠다는 내담자를 종종 봐요. 그중에는 이 사람은 절대 자살하지 않을 거다,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어요.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케이스 하나를 이야기해 주셨다. 고립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선생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자살 시도를 하겠다 하며 옥상에서 자신의 신발 사진을 몇 번이나 찍어 보내던 내담자의 이야기였다. 난 경악했다.
-세상에.
-그분이 자살을 하겠다고 사진을 보냈을 때,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분에게 자살 시도는 정말 죽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는 걸요.
-그렇죠… 그저 수단으로 사용한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분이 자살하지 않을까 걱정을 아예 안 했을까요?
-… 아니죠. 언제나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요.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 신경이 쓰였을 것 같아요.
내가 알던 누군가가 죽는다는데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가 그분이 사진을 보낼 때마다 전화를 하고, 연락을 다 받아줬으면요?
-행동이 훨씬 강화가 되었을 거예요.
선생님은 그분에게 자살 시도가 목적을 이루는데 적절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서 천천히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도왔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시면서 다시 말씀하셨다.
-정인 씨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걱정하는 마음이 들 수는 있죠. 그 아이를 너무 억압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요… 걱정을 하긴 했던 것 같아요. 아닐 거야, 거짓말일 거야, 하면서도 아침 내내 안방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어요. 조용하면 걱정이 됐어요. 욕실에서 정말 뭔가를 하고 있을까 봐…
눈물이 수도꼭지 수준이 아니고 폭포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걱정이 들 수밖에 없는 게, 어머니는 전적도 있단 말이에요. 이전에 자살시도를 했을 때도 정말 죽고 싶어서가 아니고 충동적으로, 아버지랑 싸우고 복수하겠다는 마음에서 했어서…
-정인 씨가 몇 살일 때였죠?
-유치원 때였을 거예요. 저는 그 자리에 같이 있지도 않았어요.
-어떤 방법으로 시도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수면제를 한 통을 다 먹고, 술을 드셨어요… 잘 아시겠지만 수면제만 먹는 건 그렇게 위험하진 않지만 알코올과 복용하면 호흡중추가 멈추잖아요.
내 앞에 젖은 티슈가 산처럼 쌓여가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어머니를 발견한 건 여동생이었어요. 죽는 게 뭔지도 모를 그 어린애가, 어머니를 부르면서 깨우다가 할머니한테 엄마가 이상하다며 달려간 거죠. 할머니는 아버지를 부르셨고, 어머니는 결국 욕실에 옮겨져서 약을 토했어요. 응급실을 가지도 않으셨어요. 저라면 당장 구급차를 부를 것 같은데, 왜 안 불렀냐고 하니까 남 보기 부끄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위세척까지 하진 못하고 그냥 약을 좀 토한 정도라서… 아마 삼킨 걸 다 빼내진 못했겠죠. 어머니는 그러고 이모네 집에 내려가서 일주일을 주무셨다고 했었어요.
-정인 씨는 언제, 어떻게 이 사건을 알게 됐나요?
-대학생 때요. 저는… 할머니에 대해서도 부채감이 있어서, 대학생 때 버스로 4시간씩 걸리는 할머니 집에 무조건 한 달에 한 번씩 내려갔었거든요. 할머니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전화를 했어요.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데 아버지가 “아들이 널 닮아서 약해빠졌다. 너 자살시도도 했었잖아.”라고 말했다고 저한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 지르시더라고요. 전 어안이 벙벙했어요... 처음 듣는 소리에 “자살 시도를 했었어? “라고 놀라 되물었더니, 넌 엄마가 죽으려고 한 것도 모르냐고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으시고… 사건에 대해서는 알려주지도 않으셔서 저는 할머니에게 가서 묻고 나서야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땠어요?
-그냥… 놀랐어요.
-무섭거나 하진 않았어요? 내가 어머니처럼… 어머니 같이 시도를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은 안 들었어요?
-선생님 저는 그때… 죽는 게 별로 무섭지 않았어요. 연예인 자살 소식이 들리면 부럽다고 생각했을 때라… 그래서 그냥 놀라기만 했어요.
음. 비슷한 느낌이 들던 때를 알고는 있었다.
-아. 이거 말고 그런 건 있긴 해요. 어머니가 언젠가 ”난 내가 서른 살까지 못 살 줄 알았어. “라고 하셔서 내심 놀란 거? 왜냐하면 저도 그랬거든요. 십 대때는 스무 살이 되면 시체가 될 줄 알았고, 이십 대 때는 서른 살까지 도무지 살아있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내 삶이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기분? 저는 원래 사람들이 저처럼 다 죽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건 아니더라고요. 보통은 우울증 환자가 하는 사고인데, 어머니가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 내 우울은 유전인가? “라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 생각이 들 때 기분은 어땠어요?
-글쎄요…
대답을 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절망했었어요. 절망스러웠어요. 선생님, 저는 대학교를 가면서 집에서 독립을 하게 됐지만, 그러고 나서도 힘들었어요. 분명 가족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가족과 떨어지고 나면 괜찮아져야 하는 건데, 분리되고 나서도 저는 끊임없이 괴로웠거든요. 그래서, 정말 부모님 말대로 내가 이상한 애라 그냥 힘든 건가, 내가 유별나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힘든 건데 그동안 가족 탓을 한 건가,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치의대 건물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차선 도로가 있었다. 그 도로를 울면서 건너는 내 모습이 4K 화질로 보이는 듯했다. 트라우마 재경험은 장소와 시간을 막론하고 나를 덮쳐서, 길을 걷다가도,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도, 침대에 가만 누워있다가도 옛날 일이 불현듯 떠오르면 눈물과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눈앞을 가렸다. 진짜… 길 건너면서 많이 울었는데. 그때는 줄줄 울면서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나를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 아이는 그 자리에 있나요?
이것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이불장이 있는, 햇빛이 들지 않는 할머니집 작은 방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러 들어갔다가, 총성에 놀란 고라니처럼 방에서 뛰쳐나오는 내 모습을.
-네… 지금의 제가 옆에 있다면 전화를 뺏을 것 같네요. 뺏어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아빠랑 얘기해!”라고 하고 끊어버리고, 애한테는 “네가 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라고 말해줄 것 같아요.
-그 아이가 정인 씨가 서른 살까지 살아있는 걸 아나요?
-네.
-그 아이가 봤을 때, 서른 살은 정인 씨는 어때 보여요?
스무 살의 내가 서른의 나를 바라본다. 이상한 느낌이다. 키도 똑같고, 조금은 미숙하고 앳된 얼굴의 내 눈에는 내가 신기하게 보이기만 한다. 뭐야, 꽤나 그럴듯한 어른이 되어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살고 있잖아… 그리 어렵지 않게 대답이 나왔다.
-음… 선생님. 지금의 저는 그때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정인 씨가 노력해서, 일궈낸 삶이죠.
-그렇죠. 너무 많은 일들이 그동안 있었지만, 열심히 살았단 말이죠. 그래서 스무 살의 제가 원하던 삶을 지금 살고 있나 봐요.
입가에 미소가 조금 지어졌다. 스무 살 때 난 그리 대단한 걸 원하진 않았다. 평범한 삶을 원했다. 당시의 나는 서른 살까지 살아있으면 기적이고, 시궁창에 빠지지 않은 채 평균의 삶만 살아도 놀라운 지경이었으니까.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일단… 더 이상 돈 때문에 부모님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고요. 또… 사회에서 제 위치가 생겼어요. 음, 위치가 높다 낮다 그런 건 아니고 사회에서의 제 자리요.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제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요. 그리고 저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도요. 어떻게 하면 더 제가 행복해질지 고민하고, 병원이든 상담이든 적극적으로 방법을 탐색해서 저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거요.
-그 아이에게 정인 씨가 서른까지 살아있다는 걸 말해주세요. 그러고 또 뭘 말해주고 싶어요?
-네 생각만큼… 미래가 암울하지 않다는 거요. 실수를 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거요. 늘 길은 네 앞에 있다는 것도요.
-그래요. 어떤 때는 내 앞에 있는 문이 닫혔다는 것에 절망할 수 있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보면 내가 열고 싶었던 문 옆에는 언제나 다른 문이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어때 보여요? 조금 편안해 보이나요?
-네.
-그 아이가 이제 그곳에 계속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세요.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대학생이던 정인 씨에게 필요하던 게 뭘까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부모님이 나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도록 할 수 있는 것.
-… 돈이요.
단순히 돈이 부족했던 것 보다도, 나는 돈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해,라고 모든 가능성을 단절시키던 어린 나를 구제해주고 싶었다.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어요? 여행? 쇼핑?
-여행… 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요.
돈이 드니까, 방학 때마다 방 안에서 숨만 쉬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장기 아르바이트를 할 만한 여건은 또 아니어서,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종종 하며 돈을 최대한 아끼는 것 밖에 답이 없었다.
-그럼 우리 대학생 정인 씨에게 장학금을 줘볼까요?
-하하, 장학금은 매 학기마다 받았었어요.
학비가 저렴하고 장학금이 잘 나오는 대학을 일부러 찾아갔었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정말로 지원을 끊는다면 내가 혼자 벌어서 스스로 다닐 수 있도록.
-그리고… 돈이 있었으면……. 제가 간호학과를 가지 않았을 것 같네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당장 취직을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당시 어머니가 학비와 기숙사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는 보내주시고는 있었지만, 난 여전히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한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압박감에 종일 짓눌려 살았다.
-원래는 어디 가고 싶었나요?
-생물학과요.
물론 생물학과는 분명 내 상상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 이거 아닌데,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그래도, 좀 더 돈과 심리적 여유가 있었다면, 거기 가서도 타과 전과라던지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랬다면 지금의 삶과는 또 다른 생을 살고 있겠지.
-부모님은 못 바꾸죠?
-왜 못 바꾸겠어요. 정인 씨 마음속이잖아요. 이상적인 부모를 만들어도 돼요. 전 개인적으로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애순이와 관식이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는데.
-참 이상하게… 어린 모습의 마음에게 뭐가 필요한지 물었을 때는 부모를 바꿔달라는 말은 안 나왔는데, 오히려 성인이 된 마음은 부모를 바꾸길 원하네요. 저희 부모님은 영영 바뀌지 않으실 거니까, 다른 부모로 바꿀래요. 애순이와 관식이 좋아요.
-전 개인적으로 그 드라마에서 제일 좋았던 문장이 그거였어요. 수틀리면 빠꾸.
-하하하… 진짜 제가 가장 필요한 말이었는데… 항상 벼랑 끝에 선 듯, 계속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았어서…
아직까지도 [폭싹 속았수다]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온 가족이 꼭 같이 봐야 하는 드라마라고 열변을 토하셨지만, 나는 다정한 가족이 나오는 드라마는 도무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직도 화목한 가족을 보면 마음 한 구석에서 박탈감이 든다. 내가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들. 그걸 숨 쉬듯 자연스럽게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럼 대학생 정인 씨가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하나씩 꺼내봅시다. 그리고 없애봅시다.
절망감과 고독감을 대학교 과 사무실의 파쇄기에 넣어서 몽땅 갈아버렸다. 하얀색 국수처럼 길고 가늘게 잘린 감정들은 곧 쓰레기차에 실려서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절망이 사라진 자리는 희망으로, 고독감이 없어져 빈자리는 “세상에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가족 말고도 많다는 사실”로 채웠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게 필요한 것을 이젠 내가 제공할 수 있다. 난 그것만으로 조금 행복해졌다.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고 걷지 않겠다고 떼를 써요. 부모는 아이와 거리가 있는 곳에서 아이를 기다려요. 애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쓸 거예요. 울고 발버둥 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때 부모가 아이가 운다고 돌아가서 아이를 안아 올려서 걷지 않게 해 주면 어떻게 될까요?
-행동이 강화가 되겠죠. 앞으로도 울면 해결되는구나 싶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고 아예 부모가 오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하라고 화를 내면서 아이가 자신들을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면요?
-유기불안이 생길 것 같아요.
-바람직한 방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여기까지 일단 와보자고 아이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가 오면 칭찬을 해주고, 우리 더 걸을 수 있다고 같이 천천히 걸어가는 거죠. 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운다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울겠죠.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행동을 강화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정인 씨의 어머니도, 정인 씨가 하찮거나 만만하거나 해서 정인 씨한테만 그러는 게 아닐 거예요. 다만, 자신이 으앙, 하고 울 때 돌아와서 안고 달래주는 사람이 정인 씨 밖에 없으니 정인 씨한테 그 전략을 무의식적으로 쓴 거죠.
그 말이 굉장한 위안이었다. 내가 하찮거나 만만해서가 아니야. 내가 어머니가 원하는 반응을 해서 그래. 어머니도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실 때가 되었다. 우리 둘 다, 좀 더 다르게 서로에게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