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상담기록] 10회기

뻔뻔해지고 있나봐요

by 정인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한파라는 단어로 표현이 안 되는 강추위였다. 새빨개진 뺨으로 상담소에 들어섰다.



-잘 지냈어요?



상담실은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 너머의 풍경이 겨울바람에 쉴 새 없이 짤랑거렸다. 난 가방을 내려놓고 선생님이 커피를 내리시는 새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아, 선생님 조금은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음... 어제 퇴근 10분 전에 과장님께 혼이 났어요. 지금 갑자기 고위급인사들이 관계된 일이 생겨서 이래저래 컴플레인이 많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업무프로세스를 일시적으로 잠깐 바꾸게 됐는데 그게 미흡한 부분이 있었어요. 퇴근 전에 높으신 분이 과장님께 전화하셔서 제가 과장님께 보고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물어보셨고, 과장님께서는 결국 왜 이렇게 일을 만드냐고 화를 내셨어요.



아직 얼어있는 손을 만지작 거렸다.



-혼나고 퇴근하는데 좀 많이 슬펐어요. 좋은 의도로 한 일이, 결과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예전 같으면 죽고 싶었을 것 같거든요? 난 이것도 못 하는, 쓸모도 없는 사람이야. 내가 뭘 잘한다고, 진짜 왜 살지, 죽고 싶다, 나 자신을 엄청 비난했을 거 같은데 이번에는 좀 슬프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반성을 했어요. 치열하게 반성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나, 근데 오늘 정말 일 많이 했는데, 고생 많이 했는데? 마지막 10분이 잘못되긴 했어도 그전에 7시간 50분 동안은 잘했던 거 같은데? 다른 누가 와도 나보다 특출 나게 문제없이 잘하진 못했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선생님은 갓 내린 뜨거운 커피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런데 저 진짜 하루 종일 일 진짜 많았거든요. 고위직 관련해서 일이 터지니까 파장이 일파만파여서... 연관된 분들도 다 높으신 분들이어서 정말 일하기 까다로웠어요. 전화해서 따지시는 관계자들에게 7~8분씩 설명을 드리기도 했고요. 결국 끝에는 다들 누그러지시면서 네가 참 일이 많겠다, 고생이 많다, 하고 끊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 잘못 하나가 제가 열심히 산 하루를 모조리 망치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날 하루 저에게 준 점수는 70점이에요. 열심히 한 건 알지만 문제 사항을 보완해서 앞으로 더 열심히 해라~라는 의미로요.


-중간지대가 생겼군요? 0점 아니면 100점이었는데 70점이라는 중간이 생기다니, 정말 좋은 변화네요.



중간지대라니, 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걸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아마 그동안은 0점 아니면 100점도 아니고, 아마 0점 아니면 70점이었을 거예요. 잘해야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못하면 가차 없이 0점이었거든요. 근데 이 변화가 꽤 신기하고 새로워요.


-양극단에만 있다가 중간이 생긴 건 매우 큰 변화죠.


-종종 게임에서 특정 레벨에 다다르면 그동안 막혀있어 갈 수 없던 지역이 해금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개방되지 않았던 영역이 새로 생긴 거죠.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내 변화에 놀라고 기뻐하시는 게 느껴졌다. 그저 멋쩍게 웃었다. 좋은 변화 같은데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하하. 뻔뻔해지고 있나 봐요. 얼굴 두께가 두꺼워지고 있어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기제죠. 방어기제가 적절한 정도로 작동하는 것 같은데요. 같은 상황에서 "아씨, 왜 하필 걸려서" 혹은 "아니 이걸 왜 내 탓을 해?"라는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 건데 지금 정인 씨는 무엇이 잘못 됐는지 돌아보고 있잖아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면 어떨 것 같아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죠. 스스로 되짚어보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도 필요하고, 그럼에도 스스로 잘한 점에 대해서는 인정할 줄 아는 마음도 필요한 거죠. 부끄러움이란 건 좋은 거예요.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거든요. 때로는 나밖에 모르는 부끄러움이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생기는 부끄러움보다 클 수 있답니다.


-맞아요. 내 잘못은 내가 제일 잘 알잖아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조금 어렵기도, 쉬운 것 같기도 한 목표다.



-그날 화내신 과장님 입장도 이해가 가요. 아랫사람이 보고를 안 해서 문제사항을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에 그에 대해 대답할 일이 생기면 엄청 당혹스럽거든요. 저도 그런 상황에서 제가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 화를 낸 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저걸 보고하지 않을 수가 있어!라고요.


-남 탓을 하지 않고, 과장님을 이해하려 하고 있네요. 성숙한 태도예요.



당황해서 눈을 또르르 굴렸다. 내 태도가 좋다기보다는 과장님이 좋은 분이라서 그런 거 같은데.



-그건 아마 과장님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 그런 것 같아요. 툭하면 화내고 감정적이신 분이라면 저도 과장님이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과장님이랑 3년 같이 일하는 중에 처음으로 화를 내신 거여서, 정말 제가 잘못했구나, 생각이 되더라고요. 과장님은 좋으신 분이에요. 저는 참... 운이 항상 좋은 편이에요. 좋은 상사들을 만나는 편이거든요. 그중에는 그런 분도 있어요. 아, 저렇게 늙고 싶다.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 그런 거요.


-그 롤모델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감정적이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고, 돌아볼 수도 있는 사람이요.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람이요.



그런 부모님을 두지 못한 건 참 유감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본받고 싶은 상사들을 많이 만났다. 첫 번째 직장에서의 상사는 아랫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탓하지 않고 수습을 도와주시는 분이었다. 내가 업무에 익숙해지는 동안 속 끓일 일이 많으셨을 텐데도 내 앞에서 티 낸 적이 없으셨다. 되려 내가 혼자 산다고 항상 살뜰히 챙겨주셔서 어린 나는 직장사람들이 정말 가족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직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항상 "소아과 가족"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사적으로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운동하고, 공부하려 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런 분이셔서 그분이 "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조차 다른 사람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하시는 것으로 좋게 들렸다.


두 번째로 만난 롤모델은, 공무원이 되고 나서 만난 팀장님이었다. 사실 팀장님과는 업무적으로는 이래저래 마찰이 많았다. 당시 나는 의사 표출에 미숙했다. 원래도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편이었기도 하거니와, 전 직장 또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면서 일하는 곳은 아니어서 타인과 조율을 해야 하는 업무가 처음이었다. 팀장님은 종종 실무자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셨는데, 그럴 때 난 바로 "아닌데요." 하면서 받아치는 편이었다. 스무 살이나 어린 직원이 그러면 버릇없다고 혼낼 만도 한데도 그저 "그렇군"하고 꿋꿋이 차분히 자기주장을 하셨다. 그 상황에서 팀장님이 화를 내시면 싸움이 났을 테지만, 내가 빽빽거려도 팀장님은 돌부처처럼 "알겠어"라고 응수하시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도와주셨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팀장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내가 불안에 덜덜 떨 때도, 팀장님이 괜찮을 거다,라고 하는 말 한마디에 금방 진정될 정도로. 팀장님은 빈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고, 나보다 훨씬 세상을 잘 아시니까 팀장님이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을 거니까. 그렇게 팀장님과 2년을 같이 일하면서 나도 조금씩 팀장님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일단 해볼게요."라고 말하는 법을 익혔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 감사한 사람들이 많네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참 쉽지가 않아요. 지금 당장은 제가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업무상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어렵거든요. 기분 나쁘지 않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에 칭찬을 많이 하면 돼요.



선생님이 빙긋 웃으셨다.



-학생이 평소에는 학교복도에서 조용히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 급한 일이 있어서 뛰었어요. 선생님이 그 장면을 보고 "복도에서 뛰면 안 돼."라고 지적하면 어떨 것 같아요?


-억울하겠죠. 평소에는 안 뛰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그 선생님이 평소에 "넌 조용조용히 잘 다니는구나." "심부름 다녀오는구나" 등 평소에 아이를 관찰하는 말을 했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죠. 아이는 선생님이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복도에서 뛰는 행동 하나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거예요.


-음... 좋은 방법인 거 같아요. 그냥 고생한다, 이런 거 말고 좀 구체적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평소에 주면 부정적인 피드백이 오더라도 반발심이 덜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정도는 당장 적용할 수도 있는 방법이다. 오늘은 업무 이야기만 하게 되는 듯싶지만 또 다른 조언을 구했다.



-아 그리고, 그 폭력적인 민원들 앞에서 얼어붙고 몸이 경직되는 건 뭘까요? 전에 자신이 3년 전에 받았어야 했던 코로나 지원금을 내놓으라는 민원인이 있었거든요. 사업이 종료됐다고 설명해도 자기한테 통보도 안 하고 누구 맘대로 종료시키냐고 하시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업이 종료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없다고 설명드려도 "너 공무원 아니야?? 똑바로 일 안 해??" 하면서 소리 지르시고. 감사실에 제 이름으로 민원을 넣으실 때는 제가 본인을 희롱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얼어붙는 건 정인 씨가 어렸을 때 겪었던 폭력적인 상황 때문에 더 그럴 거예요. 그럴 땐 지금의 정인 씨가 여덟 살이 아니라 서른 살이라는 걸 떠올려봐요. 이 상황이 더는 무력하고 취약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조금씩 얼음이 깨질 거예요.



선생님이 눈을 마주치며 웃으셨다.



-얼음을 깨는데 필요한 건 아주 작은 균열이에요. 아주 작은 틈새라도, 그 몸의 감각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으면 돼요.



이야기는 또 어딘가를 향해 흘러갔다.



-몇 년 전, 상담을 처음 시작했던 때는 저도 그런 게 있었어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수치심 같은 거? 가족의 비밀을 낯선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게 좋지가 않잖아요, 사실.



선생님은 아하, 하는 표정을 짓고 말씀하셨다.



-그건 아주 유구한 가스라이팅이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 내에 있는 비밀을 외부로 유출시키지 말라고 교육을 받아요.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요.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저 집에서 아이를 때린다는 걸 다른 이웃들이 모를까요?


-아뇨. 다 알아요.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요.


-모두가 다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아버지는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하면서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겠지만, 그건 내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가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거예요. 내가 왜 부끄러워야 하나요.



주입식 부끄러움이구나 그건. 부모님이 자신의 부끄러움의 책임을 자식에게 전가하는 거구나.



-그렇죠...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지나치게 과장을 해서 말했나?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런 것도요.


-상담에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느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 맞아요. 어렸을 때 일들은 그냥 맞은 게 아니라 그 감각으로 기억이 남거든요. 뻣뻣한 몸, 식은땀, 비명 지르고 싶은데 참는 마음, 그런 감각들이요.


-잘 짚었어요. 또, 사소한 일도 어렸을 때 일어나면 무척 큰일이 되니까요. 지금 누가 지나가다가 정인 씨 뒤통수를 치면 어때요.


-바로 돌아서 항의하거나 반격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하죠. 무력하기 때문에 같은 일을 당해도 훨씬 여파가 크게 남아요. 또한 나를 때리는 주체가 누군가에 따라서도 사건의 파장이 다르죠. 모르는 아저씨가 아이를 때리는 거랑, 아버지가 아이를 때리는 거랑 비교를 해봐요.


-아버지가 때리는 게 훨씬 타격이 클 거예요. 본인을 지켜줘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가해를 하는 거니까요.


-네. 아이 입장에서 아버지는 본인이 의존해야 하는 사람인데, 혼동이 오겠죠.



의존... 의존이라... 나는 '약속을 지키는 부모'라는 개념에 대해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전에 만났던 안정형 애착 친구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싸우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아버지한테 엉엉 울면서 다시는 자기 앞에서 크게 싸우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데, 부모님이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신뢰는 아주 작은 것부터 쌓여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엄마가 아이랑 장을 보러 갔어요. 아이는 지금 당장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이때 어머니는 약속을 할 거예요. 장을 다 보고 나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작은 장난감도 사줄게. 그런데 장을 다 볼 즈음 아이가 그 약속을 까먹은 거예요. 그 나이대 애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주의가 돌아가니까요. 이때 어머니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약속을 모르는 체할 수도 있고, 아이에게 약속을 상기시켜 줄 수도 있죠.



선생님은 설명을 덧붙이셨다.



-첫 번째의 경우, 아이는 분명 집에 가서 생각이 날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 화를 내겠죠. 어머니는 네가 잊어버리고 왜 나한테 그러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하실 거예요. 아이는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이게 여러 차례 강화가 되면 부모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의지할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아이는 엄청 신이 날 거예요. 내가 잊어버렸는데도 엄마가 얘기를 꺼내서 기억해 줬어! 아이스크림보다도 그 사소한 약속을 어머니가 지키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기뻐할걸요. 어머니는 그 아이 내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남게 되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끝난 상담이지만, 상담을 마무리하며 선생님은 내게 좋은 변화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씀하셨다. 상담실 밖은 여전히 코끝이 시렸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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