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지 같은 섬에 혼자 버려지다니!
상담소에 들어서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께 자랑스레 이번 주의 변화에 대해 말을 꺼냈다.
-요새는 어머니에 대한 거부감이 좀 줄었어요. 전에는 제 방에 들어오기만 해도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무슨 꿍꿍이지?" 생각을 하면서 엄청 경계했는데, 요즘은 좀 괜찮아요. 제가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나 봐요.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가 보구나."싶어요.
내 안에서 어머니가 '나를 공격하려 침입하려는 적'에서 '대화 상대가 없어서 내 방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자동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보면 올리던 마음속 가드를 덜 올리게 된 듯싶다.
-어머니의 행동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원래 제 방에 들어오면 물건을 뒤지세요. "먹을 거 없니?" 하시면서요. 전 그게 너무 싫거든요. 책장이 문 옆에 있는데 거길 정말 자주 뒤지세요. 그런데 요즘은 그것도 덜 하시는 것 같아요.
-방에만 가면 딸이 적대적인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선뜻 들어가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입구 쪽 책장을 맴돌면서 괜히 말 붙일 핑곗거리를 찾는 거죠. 그리고 물건을 만지면, 소리를 지르든 뭐든 반응이 오잖아요. 부정적 이어도요. 어머니는 그거라도 필요하셨던 거예요. 정인 씨가 이제는 경계가 덜 하니 괜히 방에 들어올 핑계를 대기 위해 물건을 뒤질 필요가 없어졌으니, 자연스레 그 행동 자체가 줄었을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원래는 어머니가 제 방에 들어와도 쳐다도 보지 않았거든요. 근데 요즘은 들어오면 눈을 맞추면서 말하니까 여기저기 쏘삭거리지 않으시고 제가 누워있는 침대로 바로 오세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또 있어요! 동생 결혼식이 이제 코앞이라서 식순지랑 그날 하루 일정표를 받았는데 부모님 일정을 챙기지 않게 됐어요. 그게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제 일정에만 줄을 쫙쫙 치면서도 부모님 일정을 흘끗 보는데, 알아서 하겠지 싶었어요. 예전에는 저보다도 부모님 먼저 챙기느라고 안달복달 못했을 텐데, 엄청 큰 변화예요! 그 의무감이 들지 않아요!
-이제 안 챙기면 안 된다는 그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군요. 이 전에는 도와줘도 오히려 정인 씨가 궂은소리를 들을 걸 알면서도 챙겼잖아요. 왜였을까요?
-글쎄요. 항상 자긴 못한다, 아프다 소리를 달고 사셔서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자식으로서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동안 상담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삶을 제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걸 배웠잖아요. 어머니가 아버지랑 이혼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선택이지 제 탓이 아니니까요.
-어머니가 살면서 희생을 많이 하신 건 사실이겠지만 자식으로서 보상해 드려야겠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입된 생각이죠. 어머니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서, 그 아이가 자라는 내내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가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신다. 너 커서 효도해야 한다."라고 자꾸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 사람은 어머니에게 다 져줄 거예요. 반항하지 못할 걸요.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정말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잖아요. 똑같이 부모님을 돕는 행동이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건 분명 달라요.
-맞아요. 이젠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제 안에 목소리가 참 많았거든요? 어머니를 챙겨야 한다는 목소리와, 그래봤자 비난만 들을 건데 뭐하러,라는 상반된 목소리요. 항상 양가감정들이 서로 싸우느라고 속이 시끌시끌했는데 요즘은 조용해요.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건 처음이에요.
-이제는 그 두 목소리가 서로 다른 방향이 아닌, 한 방향으로 향하는 걸 알잖아요. 정인 씨가 상처받지 않게 돕는 방향으로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해요. 변화가 있다는 게요. 그리고 저게 수정될 수 있다는 게요. 저게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바뀔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그동안 내면에 있는 방어기제들을 잘 살펴봤잖아요. 그 방어기제는 아주 어린 시절에 고착화되어있으니까요. 그 시절에 남아 고통받는 아이를 달래고, 이제 정인 씨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아이의 짐을 덜어주는 과정에서 조금씩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무의식들의 많은 요소들은 다 연결이 되어있어서 어디선가 변화가 일어나면 먹물이 번지듯 퍼져나가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보리밭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선생님이 빙긋 웃으셨다.
-다시 말하지만, 정인 씨가 빠른 거랍니다. 보통은 머리로 알아도 행동으로 나오는 데까지 오래 걸려요. 잘했어요.
-알아요. 보통 상담은 10회기 단위로 진행이 되는데 아직 10회기도 안 지났잖아요. 저 진짜 빠른가 봐요. 사실은 상담을 진행하면서... 초반에는 힘들었거든요. 고통이 경감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선생님이 고통 말고 방향, 변화하는 방향에 집중해 보자고 하셔서 좋았어요.
-그 마음 이해해요. 내담자들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다는 걸요. 중간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걸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바닷가에 바위가 있어요. 거센 파도를 맞으면서 바위는 생각해요. "난 왜 하필 여기 있을까? 파도가 너무 아프다." 하지만 그 바위가 약했더라면 진작 가루가 되거나 다 닳아 없어지거나, 떠내려갔겠죠. 그 바위는 강하거나, 뿌리가 깊어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정인 씨 안에도 단단한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 살아있는 모든 건 강한 거다.
-저는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울이 끝나지를 않는다...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이 있었니까요. 한번 우울이 몰려오면 머릿속으로는 알아요. 버티면 언젠가는 끝난다는 걸요. 하지만 이 과정이 평생 반복될 텐데, 앞으로 올 것을 생각하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물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 바다에 던져지면 공포스럽겠죠. 하지만 이미 물에 뜰 줄 아는 사람은 괜찮을 거예요. 엄청 무섭지도 않을 거고요. 바닷물에 젖어도 모래를 털고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물에 젖는 게 무섭지 않을 거예요.
다음 우울이 또 와도, 난 죽지 않을 거라는 거. 괜찮을 거라는 거.
-음, 이제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가족들과 당장 겪는 문제가 좀 끝나긴 했는데...
-다음 주가 여동생 결혼식이라고 했었죠? 동생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별 느낌은 안 들긴 해요. 이제 좀 익숙해졌나 봐요. 처음 동생이 집을 떠나서 결혼 전에 신혼집에서 남편이랑 미리 살겠다고 했을 때는 가지 말라고 울었어요. 동생이 되게 어이없게 보더라고요. "언니, 내가 해외 이민 가? 나 30분 거리에 살 거야."라고 했는데, 머리로야 알았지만 당시 마음은 그러지 않았어요. 동생이 영영 떠나버릴 것 같고, 동생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참 이상하죠. 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게 무서워요.
-동생을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군요. 슬펐나요?
-네. 지금은 괜찮아요. 왕래가 정말 잦긴 하거든요. 동생 얼굴을 일주일에 두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오늘은 누군가와 이별할 때 슬퍼하는 아이에 대해 말하여보는 건 어때요?
-좋아요. 자주 겪는 일이거든요. 저는 직장 동료가 부서를 옮길 때마다도 울어요...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러더라고요.
-그 느낌에 압도당하나요?
-네. 아마도요. 속절없이 눈물이 나고 상실감이 들어요. 제가 주변사람들에게 정을 많이 줘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나는데 슬픈건 당연한거지만, 압도당하는 건 또 다른 문제죠. 그 느낌에 집중해 봅시다. 그 슬픈 감각이 어디서 느껴지나요?
종격동 부근에 손가락을 올렸다.
-여기요.
-그 감각한테 더 자세하게 물어봐주세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한참 동안 협탁 위를 응시하다가 말을 꺼냈다.
-슬퍼요. 막막해요. 이게 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울고 싶어요. 이제 저는 혼자예요. 좀 웃기지만, 이 거지 같은 섬에 혼자 버려지다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 사람이 가면 그 사람 몫까지 제가 해야 하는 것도 무서워요. 의지할 사람이 없어졌어요. 혼자서도 결국은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요.
-영영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있고, 버려지는 기분도 있고, 내가 혼자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불안도 있군요.
선생님은 수첩에 뭔가를 바삐 적어 내리시고는 말을 이으셨다.
-원래 이별은 슬프죠. 하지만 정인 씨가 그렇게까지 슬픔에 압도당하는데도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 감각은, 언제부터 생긴 감각일까요?
-엄청 예전부터 그랬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지. 집중하다가 퍼뜩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 아. 초등학교 때 전학 갔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어요. 지금 보면 예전 학교랑 거리가 멀진 않긴 했어요. 제가 지금도 걸어서 30 분이면 갈 수 있거든요. 근데도 전 학교 친구들이랑 영영 작별하는 기분이었어요.
-어른 걸음으로 30분이지, 아이는 한참 걸렸겠죠. 길도 무척 낯설 테고요.
-그렇죠. 분명 헤어질 때는 또 보자,라고 했는데 다시는 못 봤어요. 그때는... 세상에,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군요. 연락도 아예 안되고, 찾아가지도 못하고... 그럴만한 상황이네요.
-친구들과 거의 생이별을 했군요. 그리고 새 학교를 갔죠?
-아, 아직도 첫날 기억이 생생해요. 저는 정말... 전학생 인사시키는 게 너무 싫었어요. 어른들도 처음 와본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걸 왜 아이한테 시키는 걸까요? 교탁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니까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어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교탁 앞에서 서 있을 때는 수치스러웠고,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었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처음 보는 책상에 앉았을 때는 여기 혼자 버려졌구나, 싶었어요. 여긴 내 친구들이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이제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구나, 그랬어요.
-어른들은 아이들의 전학을 별거 아니게 생각하는 면이 있어요. 아이들은 금방 모든 걸 잊어버릴 거고, 쉽게 적응을 할 거라고요. 하지만 다 그런 건 몸과 마음에 깊숙하게 남는답니다. 만약에 이사 후에도 친구들을 다시 보러 갈 수 있었다면, 이전 학교까지 찾아 가는 길을 누군가 알려줬다면, 혹은 이사 가기 전에 새로운 학교를 부모님과 둘러보고 조금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네. 사실 이전 학교 친구들과도 오래 인연이 이어지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이별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멀어지더라도 조금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어느 날 뚝 분리되는 게 아니라 그냥, 으레 모든 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요.
-그렇죠. 낯선 곳에 혼자 있는 정인 씨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요?
-... 위축된 것 같아요.
-그 아이를 안심시켜 주세요. 어른이 옆에 있다면 아이가 좀 괜찮아질까요?
-네.
서른의 나는 아이의 책상 옆에 의자를 끌어다가 같이 앉았다. 낯선 곳이지만, 여기 의지할 사람도 있어.
-아이가 괜찮아졌다면, 아이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옵시다. 아이는 교실 앞에서 혼자 서 있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그때 느꼈던 그 막막함과 불안들을 가져와봅시다. 이번에는 어떻게 사라지게 할까요?
-놀이터에 묻어버릴래요. 예전 놀이터는 다 모래바닥이었으니까요. 요즘은 고무판으로 된 바닥이더라고요.
케케묵은 기억 속에 이런 것도 있구나. 다음 인사이동 때는 좀 기분이 괜찮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가족들과의 문제 말고도 상담 때 다룰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