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이별에 관하여
-아, 이번에는 그거 이야기해 보기로 했는데. 연애요.
이번 세션의 주제는 저번에 이미 정해 놨었다. 가족에 관한 문제가 조금 해결되자 이성관계에 대해 다뤄보기로 했다.
-네. 정확히는 저번 상담 때 정인 씨가 이성 관계에서 "언어적인 메시지와 표정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위화감을 느낀다."라고 했었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직감적으로 "저분은 스스로의 감정이 편하지 않구나."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뭔가를 누르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사람과 나중에 좀 더 친해지고 대화해 본 적이 있는데, 일 년에 한두 번 회식자리에서 술이 들어가면 그동안 참았던 게 터져서 폭발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느꼈던 게 어느 정도는 맞는구나 생각을 했어요... 저는 자기감정을 잘 못 다루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이성관계에서는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이 적더라고요. 제가 너무 까다롭나요...? 나이 드니까 점점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건들이 많아져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우리는 꽤나 직감이 좋답니다.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아도 그냥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있죠. 정인 씨는 피해야 하는 사람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하나씩 말해줄 수 있나요?
-네. 우선은... 지기 싫어하는 사람. 저도 물론 남한테 져주기 싫어하지만,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맞다고 하는 사람이 싫어요. 그리고 자기감정을 잘 못 알아채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참다가 나중에 폭발해서 소리 지르고 화내더라고요.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 하는 사람도 싫어해요. 전에 만났던 친구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말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하는 사람이었어요.
이거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어느 날 통화를 하는데 "우리나라가 치안이 안 좋다고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어."라는 말을 하길래, 제가 거기에 "치안은 체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물론 멕시코나 총기사고가 나는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치안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치안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라고 대답했어요.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키가 180cm에다가 매일 운동하는 남자가 치안이 불안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겠어요. 근데 이다음에는 그냥 말을 돌려버리더라고요. 그런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됐어요. 제가 반박을 하면, 말을 돌리거나 또는 억지를 써서 궤변으로 이겨먹으려고 하거나. 제가 너 그거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라고 짚으면 얼레벌레 웃음으로 넘어갔죠.
난 이외에도 그 친구가 했던 정치적인 발언들을 몇 가지 꼽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 친구가 스스로 사고하고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는 말을 그대로 생각 없이 내뱉는 거죠. 그 커뮤니티에서는 그게 상식이고 법칙이고, 반박하는 사람은 린치 당하거든요... 얘기가 좀 길었지만... 아무튼 이런 조건들을 보게 돼요. 계속 거르는 거죠. 끊임없이 경계하게 되고... 근데 제가 너무 예민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만약,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불안하고, 무섭죠.
-그럼 그 불안하고 무서운 부분을 찾아볼까요? 그 감각을 떠올려보세요. 어디에 있나요?
선생님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좌측 후두부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느낌이 어때요?
-지끈거려요...
-그 감각이 우리가 본인을 알고 있는 걸 아나요? 어떻게 반응해요?
-안에서 북을 치는 것 같아요.
쿵쿵쿵. 박동성 두통이 온 머리를 울렸다. 나는 계속 왼쪽 후두부를 눌렀다...
-그 감각이 언제 처음 생겼어요?
-오래되진 않았어요... 사실은, 아까 말씀드렸던 그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생겼어요. 음... 그 친구를 만나는 내내 불안했거든요. 처음부터 그 친구가 저를 좋아해서 "그래, 만나보자" 해서 시작한 관계였는데, 결국 헤어질 때가 참 끝이 별로였어요... 제가 전화로 헤어지자고 했더니 그 친구가 밤 10시에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집 앞이래요. 나갔더니, 자기가 숙소를 잡아놨다고 제 손목을 잡고 억지로 택시로 끌고 가려고 하더라고요. 아파트 놀이터에서 이야기하자고 달래서 놀이터로 갔는데,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는 갑자기 정인 씨의 그 '경계하는 감각'이 왜 생겼는지 너무 이해가 되는데요.
-그러네요... 이렇게 생생하게 떠올릴 일이 별로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참 위험한 순간이었어요. 그래도 그냥 끌려가지 않고 참 잘 대처했던 거 같아요.
-만약 그때 정인 씨가 그렇게 대처하지 못해서, 그대로 끌려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가정에 속이 심란해졌다. 내가 피해자인 상황은 가정하고 싶지 않다.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여버릴 거야...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말을 좀 더 순화해서 말씀드렸했다.
-... 제가 그 친구를 다치게 해서 감옥에 갔을 것 같네요. 아니면 그 친구가 저희 집을 찾아와서 가족들을 다치게 하거나...?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여러모로 죄책감이 들었겠죠. 저 자신에게든, 가족에게든.
-그래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죠. 정인 씨를 지키려고 경계하는 아이는 최선을 다 했던 거예요.
-네... 맞죠. 그런데 선생님, 사실 그 친구를 만나는 내내 서늘하고, 불안한 감각이 들었어요. 근데 계속 무시하려고 했어요. 애가 나를 좋아하니까... 사람은 괜찮으니까... 애는 착하니까... 억지로 불안을 잠재우려 했죠. 저 사실 그 친구한테 집도 안 알려줬어요. 강아지 산책을 같이 할 일이 있었는데, 아파트를 짐작 못하도록 일부러 길 건너에서 만나고... 그랬죠. 만나는 내내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대충이라도 알게 되어서 아파트 앞까지는 찾아왔지만요.
-그래도 동 호수를 몰라서 다행이에요. 정인 씨의 감각이 굉장히 정확했네요. 소극적으로라도 그 감각이 행동도 했고요. 왜 그 경계하는 친구가 북을 크게 치는지 알겠어요. 조용하게 신호를 줬을 때 간과했기 때문에, 점차 위험을 알리려고 쾅쾅대며 두드리는 거예요. 구급차도 차들이 길을 양보해 주면 그냥 가지만, 양보해주지 않을 때는 사이렌 볼륨을 올리고, 확성기로 길을 비키라고 소리치면서 지나가잖아요.
아. 그렇구나. 뒤통수를 때려대는 얼얼한 감각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이 감각의 존재의 의의를 알았다.
-참... 그랬으면 안 됐었는데... 계속 헤어지고 싶었는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 친구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해서 세 달을 끌었어요... 결국은 "너는 왜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서야, 이게 서로 못할 짓이구나, 싶어서 결국 헤어지자고 했지만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자체는 좋은 거죠. 그게 있어서 어디에 도움이 될까요?
-제가 도덕적으로 살게 해 줘요.
-만약에 나쁜 사람이 되면요?
-음... 저는 제가 대우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을 대우해 주거든요. 제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하면, 다른 사람도 저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내 안에서 뭔가 튀어 올랐다. 날치처럼 해수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른 무언가를 낚아채서 들여다보았더니, 뜻밖의 기억이었다.
-...선생님, 제가 그 친구에게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던 게... 제가 처음 사람을 사귀었다가 헤어질 때 느낀 고통을 그 친구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거의 3년 반을 만난 관계였는데, 제가 헤어지자고 했음에도 제가 정말 많이 힘들었거든요.
-당시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다고 느꼈었나요?
-상대방이 상처야 받았겠지만, 그 애는 툭툭 털고 잘 극복할 애였어요. 문제는 저였죠. 제가 거기서 헤어 나오는데 정말 오래 걸려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나 봐요.
-비슷한 아픔을 주게되면 어떨 것 같아요?
-마음이 정말 안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나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그렇게 힘들었어도 결국 빠져나왔잖아요. 제가 거절하지 못해서 질질 끌었던 친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잘 나왔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친구의 힘을 제가 못 믿었나 봐요. 결국은 다 살아갈 수 있는데. 나중에 우연히 인스타를 봤는데, 여자 친구랑 찍은 사진이 프로필에 걸려있더라고요. 새삼 안심했어요.
-맞아요. 다 그 순간에는 "너 없으면 나 죽어."같은 말을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은 다 괜찮아져요. 내가 없으면 어떡하지, 생각은 하지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죠.
-정말 다행이죠... 사실은 그날 밤, 새벽 2시까지 대화했는데 끝날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라고 하고 돌려보내고, 이틀 뒤에 다시 헤어지자고 통보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친구 마지막 말이, "또 보자"였어요... 너무 소름이 돋았고... 그날부터 퇴근길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죠. 이래저래 그 친구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참 다행이에요.
소름이 돋는 팔을 쓸었다. 선생님은 다시 방향을 돌리셨다.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볼까요.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보완한다면...
-부모님에게 미리 상황을 말씀드리고 한 시간 지나면 연락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거 같네요.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날 낮에 카페에서 보자고 하는 거예요. 안전한 장소에서, 안전한 시간에.
그래. 그러면 그 친구도 그 개짓거리를 못했겠지...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순간을 지연시키고, 위험한 상황을 아예 피하기.
-그때부터 제 경계심이 허구한 날 열심히 북이랑 장구를 치는 이유를 알겠네요.
-그분을 정인 씨가 "한 번 만나보자."라고 생각해서 만났다고 했잖아요. 또다시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났다가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을 피하는 거죠.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기 전에 경계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사귄 다음에 이상한 불안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중 하나예요. 그 사람에게서 이상한 신호를 포착했거나, 혹은 정인 씨 안의 어딘가 기억이 자극됐거나. 그 두 개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죠. 필요하면 상담을 받으시는 게 좋아요.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저는 사실은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대학생 때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을 갔던 일이 있었어요. 정신지체로 정신연령 3살에,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는 100kg도 넘고, 알코올 중독에 자폐가 있던 분이 있었어요. 저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정신장애인 분들은 종종 강박을 가지고 계신 경우가 있으세요. 옥수수알을 귓구멍에 넣는 걸 좋아한다던지, 반짝이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던지...
-네. 그런 경우가 있어요.
-제가 당시에는 그런 특성을 잘 몰랐어요. 귓불에 붙는 단순한 큐빅 귀걸이를 하고 봉사를 갔는데, 하필 그 귀걸이가 장애인 남성분의 눈에 띄었던 거죠. 그분이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다른 손으로 제 귀로 손을 뻗으셨는데... 제가 발버둥을 쳐도 미동도 안 하더라고요. 프레스기에 팔이 끼인 것 같았어요. 어린아이가 개구리를 무심코 손 힘으로 터뜨리는 것처럼... 정신연령이 어린 분들은 적절한 힘 조절을 못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그분이 이전에 동일한 경험이 있었다면, "이 사람이 도망가기 전에 반짝거리는 것을 잡아야겠다"라는 마음도 있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잡았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하지만 차라리 목걸이였으면 제가 덜 무서웠을 것 같은데 하필 귀걸이라... 그분이 잡아당기면 신체적인 상해가 발생하는 곳이잖아요. 몇 초동안 얼어있다가 목소리를 겨우 내서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오셔서 떼어내셨어요. 지금도 그분이 무슨 색 옷을 입고 계셨는지도 기억이 나요. 검은색 반팔이었는데, 저는 그 해 여름 동안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길에 보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어요. 저는 이 경험 때문인지 키가 큰 남성을 보면 나를 제압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위협을 느껴요. 힘 차이가 상대가 안 됐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다시는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지 않았어요. 몇 번의 봉사가 더 남아있었는데... 도저히 갈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선생님은 이전에, 어렸을 때 꼼짝없이 잡혀서 신체적으로 무력해졌던 경험이 있느냐 물으셨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 시설 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봉사자들의 차림새를 안내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들의 특성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한 이해가 없으니까요.
그 점에서 선생님은 굉장히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그건 안내해줬어야 하는 게 맞아요. 그 시설에서 하지 않은 거죠. 상담자들이 내담자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 것처럼, 봉사기관 또한 봉사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합니다.
사실 맞는 말이다.
-네. 사전안내가 안 된 부분이 아쉬웠죠. 그리고 또 마음이 안 좋았던 건, 장애인 시설에서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도 2시간 정도 있다가 귀가를 했는데, 제 손목을 잡았던 분을 그동안 최대한 피해 다녔단 말이죠. 너무 무서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귀신같이,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알잖아요. 제가 본인을 피해 다니는 걸 눈치챈 그분은 엄청 풀이 죽으셨어요. 자신은 악의가 없었고, 사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배척당하는 느낌이 들었겠죠.
-그리고 갑자기 다른 선생님들이 와서 본인 사지를 붙잡고 정인 씨에게서 떼어내려고 하시고 하니까 당황스럽기도 했을 거고요.
-맞아요. 이래저래 참...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에요. 저한테는 신체적으로 위협당했던 기억이 남았고요.
상담이 끝나기 전, 선생님은 내게 위협당한 순간의 나를 상담소에 두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초겨울 밤거리에 서있지 말고, 장애인보호센터에 손목 잡힌 채로 얼어붙어있지 말고,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 기억 속 나를 두고 가라고. 내 기억들이 드디어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잘 쉴 수 있도록.
오랜만에 떠올린 기억들이 새삼 낯설다. 평소에 생각할 일이 없어서인지, 문득 떠올라도 모호한 언어로만 스쳐 지나가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